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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40년을 한결같은, 정지영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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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3-11-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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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은 참으로 한결같다. 언제라도 부당함과 불합리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고, 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시대의 이면을 파헤치고 소외된 이들의 울분과 고통을 함께 했다. 이 시대의 가장 가치 있는 이야기, 결코 외면해선 안 될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끊임없는 화두를 던지는, 40년 차 명장의 품격은 고귀할 따름이다.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를 잇는 정지영 감독의 실화극 3부작 '소년들'. 1999년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소재로 무고한 소년들이 살인범으로 지목돼 17년만에 무죄가 입증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영화다. 


어느 날 정지영 감독은 약한 자들이 공권력에 저항도 제대로 못한 채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힘 있고 가진 자들은 이를 이용해 출세하며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부조리한 이야기가 숱한 재심 사건 속에 비일비재함을 느꼈다. 약촌 오거리 사건으로 처음 접근을 했으나 이미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단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또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알게 됐다. 사건의 내용이 깊고 넓다고 여긴 감독은 영화화를 결심했다. 


실화 소재의 영화는 장단점이 명확했다. 많은 이가 알고 있으니 알려지긴 쉽지만, 다 아는 얘기인 만큼 흥미를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축약한 사건으로만 보여선 안 된단 생각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좀 더 배경과 깊이를 갖춰야 하고, 관객을 만날 때 이 사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접근을 통해 이해와 깨달음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려진 사건에 대한 결론만 기억하기 쉽지만, 어떤 사건이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그 사건의 내막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그 과정 속에 우리 사회의 구조가 보인다"는 정지영 감독. 


처음엔 사건을 사실대로 따라가며 17년의 연대로 풀었는데 산만하고 복잡했다. 이를 힘있게 끌고 가는 인물로 실제 약촌 오거리 속 진범을 파헤치기 위해 애썼던 황 반장을 캐릭터화시켰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리듬을 찾았다. 


감독은 애초부터 황 반장 역에 설경구를 염두했다. "이 사건을 끌고 가기 위해 자기 조직과 싸워야 하는, 그 정도의 배짱을 가진 거침없는 이미지가 필요한데 얼핏 강철중이 떠오르더라. 젊을 때 강철중이 나이가 들었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연상했다. 평소에도 설경구랑 일을 해보고 싶었다. 17년이란 세월을 뛰어넘는, 늙어서 초라해진 모습까지 그 변화를 녹일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한데 그가 쉽게 소화할 거란 생각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막상 촬에 임하면서도 제일 어려웠던 것은 법정 신에서 피해자들이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심정을 마음으로는 이해해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겠나. 연기자들에게 맡기고 끝까지 지켜봤다. 그들이 외칠 때 처음엔 오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배우들이 캐릭터를 연구하며 감정에 이입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선택이 맞단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30대지만, 감옥에서 살았고 사회생활도 익숙하지 않고 다른 이들보다 배우지 못했으며 여전히 순수한 감성을 지녔다. 그러니 이성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솔직한 심정이 나올 것이다. 게다가 몇십 년을 참아왔다. 그런 울분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연기한 게 맞다고 여겼다."


해당 장면은 사건의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도 감격한 신이다. "객관적으로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찾는 그런 모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마음에서다. 실제 피해자 역시 시사 이후 감독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고마움을 전했다. 감독은 오히려 많은 감정이 교차하더란다. "착잡하고 뭉클하며 한편으론 고마웠다. 사실 그들이 허락을 해줘서 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또다시 제가 상처를 주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그들이 잊고 싶은 사건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고맙다고 해주니 잘했구나 싶고 상당히 많은 감정이 일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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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한 이들이지만, 정작 소년들의 인생을 처참하게 짓밟은 사건 당사자들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이에 "죄의식을 갖지 않은 자들이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요소 같다. 검사가 나중에 사과했다는데 진정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는데 왜 이제야 했나. 제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힘 있고 가진자고 머리도 좋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짓을 합리화하며 약한 자에게 군림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냉정히 딱 잘라 말하는 감독이다. 


정지영 감독은 '소년들'로 실화극 3부작을 완성했다. 더러는 부러 회피하고 외면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감독의 사명감은 참으로 남다르다 말하기도 한다. "40년을 돌아보니 이 사명감이 참 부담이다. 좀 더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를 구속하더라"고 너스레인 감독은 "제가 40주년 행사를 하니까 과거를 돌아보게 되더라. 사실 제가 허무주의자다. 이 사회가 과연 나아질까 물으면 안 나아질 것 같단 생각이다. 이 허무의식을 영화를 통해 극복하는 모양이더라. '부러진 화살'이나 '블랙머니'를 봐도 항상 지는데도 불구하고 비전을 만든다. 영화를 통해 비전을 만들고 그러면서 삶의 원동력을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사회에 대한 분노도 큰 힘이 된다. 분노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했다. 


"사실 제 영화들이 정의 구현 영화라고 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어디로부터 왔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이게 맞는 것인가를 묻고 토론하기 위한 것이지,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정의라는 것도 사람에 따라 살아온 환경과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만약 어떤 주장을 한다면 '혹시 이게 맞는거니?'라고 묻는 것이지 '이게 맞다'고 하는 건 아니다." 


감독이 희망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각자 도생하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사회"다. 그리고 늘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저 무심코 지나치고 나와는 상관없다 여기는 일도 다시 한번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그저 감독의 바람이다. 


여전히 스스로의 작품에 만족하긴 어렵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에너지와 최선을 다한 긍정의 마음으로 작업에 임한단 정지영 감독. 그는 앞으로도 "철들지 않는" 삶을 꿈꾼다. "완숙이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반숙이 맛있을 때도 있지 않나. 40년을 감독했어도 아직 철이 덜 들었기에 완숙미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완숙이 되겠지. 하지만 그때도 영화를 하고 있을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에 은퇴를 하는데 아직도 버티고 있는 건 행운이다."

 

사진=CJ ENM 제공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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