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 88

    '유령' 이해영 감독이 느낀 뜨거운 찬란함 [인터뷰]

    별안간 1933년 경성 거리, 그 비극과 낭만이 공존하는 시대의 일렁이는 온기가 휘감아 한껏 도취되게 한다. 치밀하고 섬세한 설계 아래 의심과 혼돈을 넘어, 마음이 달떠 애수와 환희에 젖어들기까지, 완벽한 133분의 황홀경이다.  이해영 감독의 영화 '유령'은 일제강점기 시대, 항일 조직 흑색단 스파이 '유령'에 관한 이야기다.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의심받는 용의자들은 벼랑 끝 고립된 호텔에 갇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며 혼란을 야기한다.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캐릭터들이 얽혀 진짜 속내를 드러내기까지 미스터리한 긴장감이 끊임없이 고조되지만, 이해영 감독은 애초부터 '유령'의 시점으로 과감하게 영화를 시작했다. 자신감 넘치는 도발이다. 위기에 빠진 '유령'이 어떻게 이 함정을 벗어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암흑의 시대를 뚫고 나아가는 '유령'이 선사하는 전복의 쾌감은 물론, 강렬하게 뇌리에 박히는 색감과 우아한 미장센까지 어우러져 그저 넋을 놓고 빠져들게 한다. 그만의 유별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해영 감독이다.  그는 "영화에 담기는 것들이 시각적으로 충만한 경험이 되길 바라는 기본적인 천성이 있고 이전 작품엔 강박적으로 아름다움에 집착했다면 '유령'은 조금 달랐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말하길 '유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관련 자료를 보면 그들의 희생과 투쟁이 너무도 찬란해서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들의 절실함, 투철함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란 메시지 이전에 이렇게 충만하고 찬란한 감상을 줬다. 저가 느낀 뉘앙스를 잘 담아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색감, 비주얼, 미장센 등이 모든 수단으로 동원되어야 한단 생각에 전작들보다 유달리 더 공을 들였다고.  빗 속의 우아하고 쓸쓸한 경성 거리,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같은 빗방울, 하얗게 부서지는 담배 연기까지. 감독이 진심으로 빚어내고 정성스레 조각한 '유령'의 시퀀스는 그 어떤 사소한 신이라도 매 순간 눈 뗄 수 없이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감독이 과감하게 추리를 배제한 채 '유령'이 누구인지를 명시한 이유 역시 분명했다. "주인공이 어떻게 이 장소와 상황을 깨부수고 시원하게 폭주하는데까지 다다르게 될까를 선명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중반 이후부터는 복잡한 플롯이나 캐릭터들의 얽힘을 상대적으로 최소화하고 주인공이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인생을 다 바칠 정도로 살았던 건 일제강점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역사 속에서 작은 힌트와 뿌리를 찾으려 했고 실제 흑색 공포단이란 독립운동단체를 모티브로 했다. 이들의 역사적 기록은 상해 육삼정 의거까지다. 누군가가 바톤을 이어받아 끝까지 투쟁하고 있다면 시사하는 바가 더 클 거라 여겼다"고 했다.  결국 '유령'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극과 야만의 시대에 맞선 뜨겁고 찬란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단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들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표한다. 촘촘한 밀도의 디테일, 완벽한 미학적 추구가 그렇다.  '유령'이 감금된 해안 벼랑 끝 호화로운 호텔이라는 이질적 공간도 매우 의미깊다. 보는 순간 압도될 만큼 고풍스러운 호텔은 높은 층고와 구조물, 가구 등 사소한 소품 디테일만 봐도 그 시절 사치를 즐긴 최고위층들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윽고 이 사치스러운 공간의 또 다른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 음습하고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겨난다. 이에 대해 감독은 "처음엔 안락한 공간 안에서 캐릭터들이 부딪히고 교란하는 느낌이 반짝거리고 색감이 많은 공간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장르 변주가 일어나면서는 확 달라져야 했다. 모든 인물과 공간의 민낯이 드러나며 어둡고 색도 없고 더럽고 질척대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면 재밌겠단 생각에 그런 두 가지가 동시에 모여 있는 공간으로 이중적 설계를 했다"는 설명이다.  실로 치밀한 디테일이다. 다만 준지 역의 설경구는 제복 모자가 1mm 라도 어긋나면 이를 바로잡는 이해영 감독의 디테일에 혀를 내둘렀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감독의 항변(?)은 꽤 재밌다. "준지가 경무국에서 좌천됐다가 다시 복귀하는, 이 사람에겐 가장 큰 숙명같은 상징적인 상황이다. 각 잡고 가져온 제복과 모자를 다시 쓰는 것인데 한 번에 써야지 여러 번 고쳐 쓰면 없어 보이지 않나. 선배님이 쓰실 때 약간 마크가 돌아가 있었다. 멋있는 각도를 찾아야 하는데 웃기거나 귀여우면 안 되니까 일미리만 내릴게요, 올릴게요 한 거다. 저의 결벽 때문이 아니라 설경구 선배가 갖고 있는 멋짐을 일미리도 손상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담기 위한 것"이라고. 저가 그리 유난을 떤 덕분에 짜증은 났을지 몰라도 멋지게 담긴 것 아니냐는 능청이다.  비극과 애수, 허망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한 사람들의 가치를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그려내고 싶던 감독의 열망이다. 주인공 차경(이하늬)이 조선 최고의 재력가 집안 딸임에도 독립운동을 하는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란 낭만적인 설정도 감독의 바람이다. "안온한 채로 살아도 될 만한 환경의 사람이 이런 희생을 각오할땐 아마 굉장히 사적으로 밀접하게 그녀를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든 동기가 있었을 거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결핍과 갈망이 어떻게 발현된다면 이는 짐작 가능한 정도의 규모가 아닌, 더 크고 거대한 느낌의 감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이라는 이름 또한 어떤 찬란한 감정과 뉘앙스 안에 담겨서, 이 전체가 뭔가 가슴을 뜨겁게 만들면 좋겠단 맥락으로 묘사하고 집착했다." 감독은 실제 그 시절을 살았다면 "용감하게 살았을진 모르겠다. 최소한 비겁하게 살지 않으려, 용감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해 본다.  이해영 감독은 그만의 확실한 고유색이 있다. 또한 지향하는 바도 뚜렷하다. "매번 다른 이야기를 한 것처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본능적으로 하나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제게 중요한 건 매번 영화를 만들때 인물을 어떻게 담느냐다. 시나리오 쓸 때 캐릭터와 배우가 소화할 때의 캐릭터를 잘 응용해서 가장 매력적이고 정점의 연기를 소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제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해영 감독이 영화를 찍는 보람이다. 그렇기에 "1mm의 차이를 계속 결벽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며 웃긴다. 어쨌든지 이 같은 진심과 고집으로 독보적인 연출과 감각적 미장센의 정점에 도달한 이해영 감독이다.        사진=CJ ENM 제공

  • 87

    '유령' 이하늬, 우아한 절제와 발산 [인터뷰]

    우아하면서도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인물의 황홀한 몸짓에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다. 고도로 절제된 감정 이면엔 뜨겁게 일렁이는 애수가 넘치고, 기품 있는 동작으로 세련된 액션 쾌감을 선사한다. 차갑고도 뜨겁던 비극의 시대 속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 속 이하늬다.   1933년, 일제강점기 시대 경성. 조선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 버건디 코트와 재킷, 롱 스커트, 워커 차림의 꼿꼿한 자세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 뛰어난 재력가 집안의 자제답다. 하지만 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여인의 절제된 눈빛에는 언뜻 번뜻 미세하게 드러나는 아픔이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심어진 항일조직 흑색단 단원 '유령'으로 의심되는 첫 번째 용의자다.  이하늬가 맡은 차경은 극의 처음부터 '유령'임을 명시하는 캐릭터다. 그의 시점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고립된 밀실에 갇힌 후 이 함정에서 무사히 벗어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표가 주어진 인물이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비롯해 수많은 단원들의 죽음을 봤다. 하지만 깊은 슬픔에 지지 않고 강인하면서도 결연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특히 조선 최고 재력가 집안 딸로서 보장된 삶이 있음에도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이하늬는 차경이 "아마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거란 생각이다.  "재력가 집안에 태어났으면서 목숨 내놓고 독립투사를 할 수 있을까. 차경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극 중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란 대사가 있다. 그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했을까. 사람이 살아갈 때는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며, 한 순간에 무의미한 흙으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며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처음엔 너무 허무하고 해석하기에도 웅장하고 버거웠다. 그러다 차경 대사 중에 '살아. 죽는 건 죽어야 할 때, 그때 죽어'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 차경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는 찬란한 삶을 노래하며 살지만, 그 시절 독립 위해 삶을 내놓은 사람들은 '죽음을 위해 사는 삶'이었을 거라고.  비극의 시대를 버티고 맞서며 살았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하지만 이하늬는 그럴수록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다. "삶을 투쟁하며 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슬픔을 표출하지 않고 얼마나 응축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인지를 그리려 했다. 그 속에서 차경이 보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느낀 차경은 회색의 질감을 가졌다. "내면은 아주 뜨거운 빨간색 마그마가 끓고 있지만 절대 드러내지 않는." 이하늬는 나직한 저음으로 토로되는 감정과 결연한 행동까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물의 심리를 수려하게 표현해 낸다.    근래 접해보지 못한 캐릭터라 차경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것이 좋았단 이하늬는 "쪽빛 하늘에 물들듯,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캐릭터의 한 장면, 한 얼굴, 그 찰나가 생각난다면 저는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관객에겐 한 신으로 기억될 장면이지만, 이하늬는 인물의 깊이 응축된 감정을 켜켜이 쌓아갔다. "처음과 후반의 차경이 다르다. 이 캐릭터도 변모하며 나아가고 있다. 슬픔의 모노톤을 조금씩 벗겨가며 앞으로 뚜벅뚜벅 전진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상적 걸음걸이와 후반부 액션신의 걸음걸이가 다르다. 처음 밀실에 갇힐 때 정면을 응시하는 단단함도 달랐다. 제가 음악을 오래 해서 대사도 음처럼 듣는 경우가 많은데 캐릭터 구축할 때 차경은 조금 울림이 있고 깊이가 파져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의 것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 이처럼 뜻밖의 디테일들을 심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하도 절제된 인물로서 차경을 그리다 보니 꽤 어렵기도 했단다. "어떤 예술의 형태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경지에 오르는 게 정말 극상의 작업이라 생각한다. 국악을 오래 해서 그런지 아주 정적인데 손하나를 탁 치는 순간 나오는, 가느다란 선에서 나풀대는 미학의 아름다움. 이를 떠올렸다. 일차적인 연기 너머에 있는, 아무것도 안 하는 듯 보이지만 수많은 레이어들 사이의 끝에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길 바라며 최대한 절제해 연기했다"고.  절제된 인물의 액션은 오히려 절도있고 우아하다. 이하늬는 "액션이 확실히 늘은 것 같다"며 환한 미소다. "근력은 체력이다. 꾸준히 몸을 단련시켰고 두들겨 맞자. 많이 맞으면 맷집이 생겨 오히려 안 아플 거란 생각도 했다"고 은근히 웃기기도 한다. 덧붙여 "차경의 액션은 흔들려선 안 됐다. 여기서 보이는 에너지가 차경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지를 나타내기에 더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많이 받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어설펐던 모습도 많이 익숙해지더라"고. '유령'은 항일영화지만 우아하고 매혹적인 미장센과 더불어 통쾌한 판타지까지 기존의 일제강점기 시대극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하늬는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정말 반가운 영화적인 영화였다. '아, 이런 게 영화였지' 하는 느낌이다. 저도 집에서 OTT를 편하게 보는게 익숙해진 시대지만, 이렇게 완전히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영화적 재미와 쾌감이 확실했다"는 소회다.  마지막으로 이하늬는 겨울이 추워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떤 역경에도 꺾이거나 변하지 않았던 비극의 시대. 그래도 낭만과 희망을 꿈꿨던 사람들에 대해 위안을 전한다. "이 것이 우리 영화의 메시지라 생각했다. 참 많이 와닿았다. 지치지 않고 될 때까지 한다. 이런 근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지금의 K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며 "저한테 여러 인생의 분기점이 있지만, '유령'은 제 배우 인생에 새로운 분기점이 되는 영화"라고 각별한 애정을 전했다.      사진=CJ ENM 제공

  • 86

    설경구의 '유령' 찬미 [인터뷰]

    역시 압도적인 무게감이 있다. 복잡한 내면 심리를 가진 인물의 철저한 이중성으로 끊임없이 관객을 교란시킨다.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 속 설경구다.  1933년, 경성. 명문 무라야마 가문 7대손으로 조선말과 사정에 능통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엘리트 군인이었으나 불미스러운 가정사로 좌천돼 경무국 소속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으로 파견된 무라야마 준지. 그의 냉철하고 차가운 눈빛 이면에는 들끓는 분노와 수치,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런 복합적인 속내를 반영한 듯한 도마뱀 같은 초록색 의상,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 잡힌 제복 차림은 설경구의 또다른 모습을 예고한다. 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매번 새로운 얼굴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이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감독은 장르물로 접근하고 싶다고 했다. 장르적인 색감과 결이 다른 작품이라 관심이 갔고, 그 시대를 착장한 것만으로도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작품을 하게 됐다"고 말문을 연 설경구다. 꽤 날카로워진 얼굴은 "군인 캐릭터 설정이기에 얼굴에 각이 살아났으면 해서 살을 뺐다. 아무래도 군인인데 두리뭉실해 보이면 안 되잖나"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조선총독부에 심어진 항일조직 스파이 단원 '유령'으로 의심받는 다섯 명의 용의자들. 그 중 하나가 설경구가 맡은 일본인 준지다. 그는 유력한 용의자임에도 '유령'의 혐의를 벗고 진짜 '유령'을 찾아내 다시 화려하게 일선의 지휘부로 복귀하고 싶어 한다. 이에 악랄하고 지독하게 '유령'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의 출신 성분이 의심과 혼란을 거듭하게 한다. 설경구는 마치 안개 같은 캐릭터다.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속내와 표정은 관객의 긴장과 혼돈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설경구는 제가 맡은 준지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기능적인 역할을 맡은 캐릭터라고 했다. 이에 충실하게 연기하는 것이 '유령'이 시작이었다. "혼선을 주고,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하고, 정확한 꼭지점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의심하고 의심받는 캐릭터"로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접근이었다. "준지의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지우려고 하는 준지의 모습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또한 준지의 치욕이자 콤플렉스가 된 비극의 가정사는 그를 더 강압적이고 집착적으로 매달리게 했을거란 설명이다. "군인 명문가 7대손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갖는 반면 계속해서 혈통이 부딪혀 속은 콤플렉스 덩어리다. 그가 버티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집착적인 성공이다. 그가 끝없이 올라가려는 것은 야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꽤 연민이 갔다"고. 인물의 감정을 단정 짓기가 퍽 어려웠다. "한 가지 감정으로 설명이 안 된다. 치욕과 분노도 있을 거고, 참 복합적이다. 엄마를 저주하진 않았을 거다. 분명 애정했을 거다. 그런 감정들을 나열하기 참 어렵다. 저도 모르겠다. 준지의 속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탁월한 소화력을 자랑한 설경구다.    이해영 감독과의 작업은 처음이었다. "과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색감에 대해선 굉장히 다른 눈을 가진 것 같다. 과감한 색감을 쓰고, 꼼꼼하고, 정확하게 딱 떨어지길 바란다. 저도 애드립을 안 좋아하는 편인데 계산적인 연출을 하는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확고한 디테일 때문에 나름 애를 먹기도 했단다. "제복 입었을 때 모자 중심점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 '좌측 모자챙 1mm만 내려줘' 이런 식이다. 머리에 쥐 나고 하도 깃을 세워서 목에는 힘이 들어가고 그런 건 불편했다. 공화당 신은 특히 장시간 찍어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모자를 쓰지 않겠다고 우겼다. 가죽 롱코트를 입으니 만만치가 않고 이걸 입고 액션을 하는 것도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볼멘소리다. 하지만 "의상 색감이 참 부담스러웠는데 입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제가 초록색 코트를 언제 입어보겠나. 또 그 안에는 진한 자주색 베스트를 입는다. 참 멋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봐왔던 그 시절 흑백 사진에 과감한 색을 입히고, 모든 신을 마치 한컷한컷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닦아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큰 애정을 가졌구나 싶었다"고 감탄하는 그는 역시 '츤데레'의 전형이다.  이어 설경구의 '유령' 찬미는 계속됐다. "거친 것도 있지만 섬세함도 있다. 색감이 세게 입혀지니까 초반엔 보면서 정말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통쾌한 판타지를 녹여낸 스토리에 흡족함을 드러낸다. "정말 반가웠다. 그동안 너무 투톱 브로맨스만 많지 않았나. 시대적 장르 영화지만 여성 캐릭터의 전사로 시작되는 영화인데다 여성 액션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고, 더 강렬해도 괜찮단 생각을 했다. 정말 매력적이었다"는 그는 "초반의 이솜 씨는 짧은 분량에도 너무 강렬했다. 마지막 이주영 씨 착장도 강한가 싶지 않나 했는데 오히려 그 색깔이 강렬하게 각인되고 생각이 나더라. 이 영화는 이하늬와 박소담이 끌고 간다면, 시작은 이솜이 열고 끝은 이주영이 닫았다고 생각한다"며 여배우들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낸다.  특히 함께 액션 합을 맞춘 박차경 역의 이하늬에 대해 "액션 상대로 정말 훌륭한 배우다. 상대와 액션 합이 안 맞을 때 짜증을 내면 아무리 선배라 해도 부담스럽고 신경쓰인다. 하지만 안 맞는 순간에도 전혀 티를 안 내고 촬영 내내 너무 밝은 에너지를 줬다. 하늬 씨 덕분에 즐겁게 촬영했다"고 고마워했다.  반면 자신에겐 "호텔 내부에서 손 끝에도 긴장감이 있어야 하지 않았나, 왜 좀 더 촘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야박한 자평이다. 무려 31년 차 배우임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연기엔 인색한 그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행복감만은 확실히 자부할 수 있다. "초창기에는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되나. 그냥 연기를 하던 순간이 있었다. 이 촬영 끝나면 다음 작품 하고 있는 그런 날들, 어느 순간 '아 추락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불한당'으로 구제, 아니 구원을 받으면서 소중함을 느꼈다. 감사해졌다. 현장에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자산어보' 찍을 때도 섬이란 특수성 때문인지 아침 일찍 촬영장에 가서 이정은 씨랑 바다 보면서 '정은아, 정말 행복하지 않냐' 이렇게 얘기했다. 스태프들은 분주하고 역동적으로 촬영을 준비하고 있고, 이 현장에서 숨을 쉰다는 것이 감사했다." 이 솔직 담백한 어느 날의 감상이 그가 깊이 간직한 진심이다.  아직 그는 연기에 절실함을 느끼고 싶진 않다. 절실하면 괜히 오버할 것 같아서란다. "절실함보단 감사함을 느끼며" 연기하고 싶다. "현장에 있는 걸 계속 감사해라." 31년 차 배우가 늘 되뇌는 말이다. 그 안에 말로 다 못한 깊은 애정과 소중함이 깃들었다.      사진=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