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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뜨거운 외침, 실화극의 묵직한 여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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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3-11-0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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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이기에 더욱 원통한 공분이 차오르고, 안타까운 연민이 인다. 그렇지만 종국엔 작은 희망과 안도가 깃든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는 부당함과 불합리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이들의 값진 용기의 가치를 전한다. 숱한 실화극을 통해 시대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소외된 이들의 울분을 함께 했던 정지영 감독의 신작 '소년들'이다. 


'소년들'의 가제는 '고발'이었다. 추악한 공권력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망가진 약자들이 오랜 인고의 시간을 지나 가해자들을 고발하는 이야기,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그들의 용기와 아픔을 응원하며 위로하는 감독의 사려 깊은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소년들'은 이른바 '삼례나라슈퍼 사건'으로 불리는 강도 살인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99년 무고하게 살인자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소년들이 2000년 재수사 과정을 거쳐 2016년 재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사건의 연대는 꽤 복잡한 구조이지만, 감독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해 리듬감을 살리고 더욱 극적인 몰입감을 이끌어낸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지는 무기력한 중년 황준철 반장의 모습으로 시작된 영화는, 과거 그가 강력반 수사반장 이른바 '미친개'로 불리던 시절과 교차되며 그가 겪었을 갖은 노고를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과거 의문의 제보전화를 계기로 슈퍼 강도치사사건의 재수사에 나선 그는 사라진 현장검증 영상부터 어긋난 진술, 조작된 증거까지 사건을 파헤칠수록 드러나는 엉터리 졸속 수사 방식에 분노한다. 결정적으로 수감 중인 소년들을 만난 뒤 잘못된 수사를 바로잡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뜻의 '미친개' 황준철 반장은 뜨겁고 강렬한 정의감과 직업적 사명감을 가진 인물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그를 짓누르고 억압해도 결코 꺾이지 않고, 옳은 길을 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진범의 자백과 모든 증거를 찾아냈음에도 경검찰이 소년들을 무언의 압박과 위력으로 짓누르며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게끔 만드는 순간. 황 반장은 자신의 힘과 정의로는 도저히 깰 수 없는 거대한 위력에 비참한 절망과 허무를 뼈저리게 느낀다. 


분노와 좌절 속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진급 누락 상태로 외딴 지역만 뺑뺑이 돌며 살아왔을 황 반장의 고난의 세월은 늙고 주름진 얼굴과 허망한 눈빛만으로도 여실히 느껴진다. 그가 다시금 재심 신청을 하겠다며 도와달라 찾아온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모습은 퍽 인상깊고도 인간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장면이다. 그 역시도 이제는 정년퇴직을 고작 1년 남긴 힘 빠진 파출소장이다. 부당한 권력의 위선자들은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출세의 자리에 이르러 여전히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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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소년들을 만나 재심을 포기하라 설득하겠다며 길을 나선 그가 이젠 어엿한 청년이 돼서도 여전히 어리숙하고 순진한 그들을 보며 느꼈을 감정, 그리고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소년들의 모습이 교차되는 신은 이토록 뭉클하고 깊은 연민을 일게 한다. 


영화는 이윽고 재심 과정에 돌입하며 법정물로 전환되고 그 특유의 긴장과 몰입을 잘 살렸다. 앞서 법정 실화극 '부러진 화살'로 치열한 법적 공방전을 그려낸 감독의 장기와 묘미가 다시금 발휘되는 지점이다. 여전히 죄의식 없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며 그들의 뻔뻔하고 추악한 정의를 믿는 가해자들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탄식과 깊은 분노를 자아낸다. 


그렇기에 그들에 짓눌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소년들이 종국에 외치는 커다란 항변은 더욱 깊은 의미와 감동을 일으킨다. 


결국 '소년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이 세상 또다른 '소년들', 힘없는 약자들의 처지와 고통을 대변한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큰 용기를 낸 '소년들'과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고 같이 싸워주는 사람들의 진심, 그 소중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전하고자 하는 영화다. 


실화이기에 더 깊은 여운과 생각할거리를 남긴다. 무엇보다 묵직한 이야기 속에서도 상냥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인상적이다. 치를 떨게 하는 악인들도 존재하지만, 피해자들을 돕고 그들을 응원하는 따뜻하고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힘이다. 특히 황 반장 아내 역을 맡은 염혜란은 이 기능을 더욱 맛깔나게 소화하고, 슈퍼 사건 사망자의 딸로 분한 진경은 소년들을 향한 자책과 진심 어린 온기로 극을 감싼다. 이밖에도 진범 역과 소년들까지 조화로운 연기력의 배우들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황 반장 역을 맡은 설경구는 외적인 모습은 물론 세월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감정적 동요까지 16년의 세월을 유연하게 아우른다. 애초부터 그를 염두하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감독의 탁월한 안목이다.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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