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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 잊힌 영웅들에 대한 뜨거운 경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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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3-09-27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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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가난과 설움과 울분이 가득했던, 가엾고 작은 나라의 이름 모를 동양인이 국제 사회에 당당히 이름을 알리게 된 엄청난 사건. 그러나 정작 자국민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 마라토너 이야기를 그린 영화 '1947 보스톤'(감독 강제규). 영화는 잊힌 역사 속 바래진 영웅들에게 차마 못다 한 존중과 감사를 표하며 현시대에도 퇴색되지 않는 가슴 벅찬 메시지를 전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단상에 오른 금메달리스트의 모습은 의아할만큼 침울하고 비참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월계수로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가린 금메달리스트. 그리고 그마저도 가릴 수단이 없어 바지를 최대한 올려 입은 동메달리스트의 모습. 영화의 시작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이름으로 시상대에 올라야 했던 손기정 선수의 수치와 비통함이 가득 담긴 표정. 이는 그 시절을 견뎌야만 했던 이들의 고통을 통감케 하는 모습이며,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단상이다. 영화는 여기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의 모습 역시 조명한다. 영화가 앞으로 담을 서사의 목적과 인물을 명확히 의도하고 있는 시퀀스다. 


영화는 직후, 해방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관망한다. 일장기를 가린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더는 달릴 수 없었고, 이북에 두고 온 자녀들 때문에 늘 술에 절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손기정(하정우). 베를린 올림픽 당시 국민들에 희망과 긍지를 느끼게 하고, 동네 아녀자들도 마라톤에 들뜨게 했던 국민영웅의 초라한 실체를 담아낸 건 놀랍고 새로운 접근이다. 남승룡(배성우)은 여전히 마라톤을 하며 국가대표 양성에 힘쓰고 있는 감독이다. 


영화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삶과 시대를 관조한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무늬만 존재할 뿐, 미 군정 하에서 민족과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모두가 혼란스럽고, 가난한 설움과, 나라를 온전히 되찾지 못한 울분과 비참함이 가득한 시대. 가엾은 민족은 대한민국의 이름을 온전히 되찾는 국가적 소명보다 먹고사는 것이 더 절박하다. 청년 서윤복(임시완)은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굶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무작정 뛰는 법을 익혀 남달리 발이 빠른 그는 각종 마라톤을 섭렵하는 중인데 목표는 상금 때문이다. 실존 인물과는 다른 영화적 접근도 꽤 재밌다. 


이렇게 영화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당시 시대가 지닌 분위기를 자연스레 담아낸다. 딱하고 안쓰러운 시대의 비극이 절로 애수를 자아내고, 이들이 해방 후 첫 국제 마라톤 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여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이 영화는 주인공을 가로막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극의 시대가 가장 큰 허들이자 빌런이다. 그렇기에 세 인물들이 계속해서 겪는 위기와 갈등은 애간장을 졸이게 하고, 안타까운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실화이기에 더욱 깊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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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막대한 권력과 부를 손에 쥔 친일파 잔재들에 꺾이지 않는 대쪽같은 손기정의 모습, 그리고 위기 시마다 결국 대한민국을 일으키게 했던 자랑스러운 국민성을 담아낸 신은 작은 쾌감과 뿌듯함을 불러일으킨다. 


미국 현지 재정보증인으로 등장한 교민 백남현(김상호)의 모습도 퍽 인상깊다. 그는 독립국가가 아니기에 태극마크를 달 수 없다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 위원회에게 혼신을 다해 항거하는 세 인물의 모습을 보며 비관한다. "국가가 대체 해 준 게 뭐가 있느냐"고. 그랬던 그가 그들의 통역을 전하고, 종국엔 이뤄낸 값진 승리에 눈물을 글썽이며 얼싸안는 장면은 특히 감동적이다. 비극의 식민지 시대를 겪어온 무력하고 가엾은 국민들, 국가 의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될 수밖에 없던 나라 없는 설움. 이 결핍된 민족 주체성이 빛나는 자긍심으로 채워지는 환희와 영광의 순간인 탓이다. 


이처럼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을 딛고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린 세 사람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고 가슴 벅찬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영화의 만듬새는 간혹 예스럽고, '신파'를 우려해 지나치게 극을 절제한 아쉬움이 있다. 축약된 서사로 인해 감정선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기도 하다. 실존인물들의 더욱 드라마틱한 서사와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그저 휘발된 지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진정성만큼은 소중하고 값진 영화다.


실감 나는 마라톤 대회 신은 '1947 보스톤'의 또 다른 묘미다. 자칫 단조롭게 여겨지는 마라톤을 이토록 박진감 넘치고, 생생한 현장감으로 구현해 낸 지점은 놀랍다. 체지방 6%의 단단한 체구를 비롯한 외적인 요소와 대한민국에겐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경기에 임하는 국가대표의 심경, 달리는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세의 변화까지 한 치의 의심 없이 놀라운 열연을 펼친 임시완에겐 그저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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