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80대 노인의 친일파 숙청기, 그 처절하고 짜릿한 응징 [리뷰] > 리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리멤버' 80대 노인의 친일파 숙청기, 그 처절하고 짜릿한 응징 [리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2-10-26 13:55

본문

c.jpg

잘빠진 빨간 포르쉐가 차선을 가로지르며 위태롭게 질주한다.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던 차는 중앙가벽을 들이박고서야 비로소 멈춘다. 연기가 나는 차에서 내린 이는 의외로 백발의 노인이다. "부서진 차, 손에 묻은 피, 권총 한 자루,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영화 '리멤버'의 시작이다. 


80대 고령의 노인이 눈을 뜬 곳은 그가 일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은퇴 후 십년 넘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최고령 알바생 한필주.(이성민) 그는 같이 일하는 손자뻘의 젊은 알바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특히 인규(남주혁)와는 서로 브로라 부르며 시그니처 인사법까지 나눌만큼 절친한 사이다. 꼬마 손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산타 복장을 한 채 현란한 템버린 쇼까지 펼칠만큼, 유쾌한 '인싸 할배'다. 또한 '갑질' 손님의 행패에 당한 인규를 위해 노련하고 영리하게 골탕을 먹이는 모습도 보통 '할배'가 아니다. 


이처럼 친근하고 활기 가득찬 노인의 모습을 한 필주는, 사실 뇌종양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아내마저 세상을 뜬 뒤, 그는 생의 마지막 과업을 시작하려 한다. 기억이 목숨보다 빨리 사라지고 있는 그가 평생을 붙들고 살아온 기억에는 일제강점기 때 가족을 모두 죽인 일제의 부역자들, 친일파의 만행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의 낡은 지하실을 가린 천을 거둬내면 단죄의 대상들이 드러난다. 숱한 잠복과 미행으로 대상의 행적을 지켜봐왔을만큼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친일파들은 사회지도층의 명예와 부까지 거머쥔 채 살아가고 있다. 60년간 그들의 행적을 꼼꼼히 지켜보며 때를 기다려온 노인이 60여 년 전 땅에 파묻은 권총을 다시 꺼낼 때, 그 결연하고 과감한 의지가 숙연할 정도다. 


"내 이름은 한필주, 뇌종양 말기 알츠하이머 환자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복수를 시작하기 전 그가 기록하는 동영상의 첫마디다. 자신이 왜 복수에 나서는지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담담하다.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손가락에 처단해야 할 대상의 이름을 검은 먹으로 직접 새겨넣었을 정도다. 이처럼 결연한 노인의 모습이건만 구부정한 허리와 어깨, 거친 호흡과 느린 걸음걸이, 얼굴에 핀 주름과 검버섯,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의 노쇠한 외양이 어쩐지 안쓰러움을 더한다. 또한 평생을 간직한 치욕과 통한의 처절함이 엿보여 마음을 무겁게 한다. 

 

cats.jpg


'리멤버'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느 복수극과는 달리 복수를 하는 이와 처단 대상 모두 노인이라는 특수한 상황. 게다가 이같은 개인의 복수극을 통해 일제강점기를 현시점의 이야기로 바라보는 현실적인 시선도 신선한 발상이다. 


노인의 복수극은 필생의 복수를 꿈꿔온 이의 처절함과 더불어 잃을 것이 더 이상 없는 이의 과감함이 담겼다. 노인의 순발력과 기지로 펼쳐지는 액션은 특히 볼거리다. 플라스틱 물병을 활용한 소음기, 콜라 캔과 화약가루를 섞어 만드는 탄약 등은 세월감과 현명함이 묻어나는 독특한 액션으로 보는 재미를 더한다. 


복수의 대상인 대기업 회장, 대학교수, 자위대 퇴역 장성,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장군 등의 면면은 노인의 복수극을 간절히 응원하게 만든다. 여전히 그들이 내뱉는 논리는 익숙하고도 치가 떨리는 궤변이다. 한 인간에게는 평생에 해당할 60여 년의 시간을 괴로움과 좌절, 자책감 속에서 살아왔던 노인과는 반대로 악행을 정당화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온 이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향한 노인의 통쾌한 단죄는 절정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울림과 공감을 낳는다. 


'80대 노인의 친일파 숙청기' 이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더욱 의미있게 하는 건, 현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창구 역할을 하는 극 중 20대 청년 인규의 시선과 생각 덕분이다. 친일파 숙청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법치국가로서의 정의 등 이는 많은 사유와 시사점을 야기한다. 


영문도 모른 채 80대 노인의 복수극에 휘말리게 된 절친 20대 청년. 이들이 주는 뜻밖의 '케미'는 물론, 복수극이란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그 저변에 깔린 주제의식을 영리하게 전달하는 효과적인 호흡이다. 


이성민의 노인 연기는 조금의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을만큼 감쪽같다. 특히 종종 치매 증상이 와 탁해진 동공으로 멍하게 한 곳을 응시하는 눈빛부터 평생의 통한과 처절함이 가득 차오른 눈빛까지, 그 검은 눈동자 심연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이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마지막 신에서 이성민과 남주혁이 나눈 대사와 표정들은 오래도록 뭉클하고 따스한 여운을 준다. 


유쾌한 팝콘무비 '검사외전' 이일형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공감 0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labe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추천뉴스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