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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이 독이 된, 황정민 '인질'극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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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1-08-1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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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 황정민이 납치됐다. 신선하고 충격적인 발상이다. 믿기진 않지만 한편으론 그럴싸한 현실성을 갖는다. 그런데 리얼리티를 베이스로 한 이야기에서 '왜' 황정민이 납치돼야만 했는지의 연유는 대책없을 정도로 허무하고, 인질범들의 '비현실적'인 행위들이 계속해서 맞물리며 '리얼'과 '허구' 사이의 간극을 좀처럼 좁히질 못한다. 한데 섞이지 못하는 인지부조화가 몰입을 방해하고 발목을 잡는다. 영화 '인질'(감독 필감성)이다. 


친근하고 소탈한 이미지와 더불어 28년 경력의 연기 베테랑으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물급 배우 황정민. 그는 신작 영화 제작발표회 뒤풀이 이후 귀가길에 들른 집 앞 편의점에서 어쩐지 불량하고 께름칙해보이는 인물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여배우 몇 명이랑 자봤느냐"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도발이 기가 차다. 연예인이기에 겪는 고충이라고 치부하기엔 선을 넘었다. 불쾌한 기분을 안고 겨우 돌아서는 길에 느닷없이 전기 충격기 공격을 받고 쓰러진 뒤 알 수 없는 지하실로 납치된다. 그곳에는 최근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여대생이 손발이 묶인채 감금돼 있는 상황이다. 몰래카메라인가 터무니없는 생각도 해볼만큼 도무지 믿기 어렵다. "상황 파악이 안 돼? 이거 진짜야"라는 섬뜩한 납치범의 말이 뇌리에 박힌다. 인질범 패거리들은 몸값 5억을 요구하고, 황정민은 생각한다. 심상치않은 인질범 패거리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납치 스릴러 '인질'은 관객에게 새로운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실제 배우 황정민이 납치됐다는 파격적인 설정에서 오는 흥미와 신선도가 남다르다. 자연스레 '왜' 황정민이 납치됐는지,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자'는 누구인지 기대와 호기심이 증폭된다. 실제 영화는 94분의 러닝타임에 걸맞게 군더더기 없이 속도전으로 밀어붙인다. 다소 엉성한 개연성을 감안하고 황정민이 서울 한복판에서 납치되는 상황은 짜릿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막상 인질범들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고 그들의 무자비한 행위가 펼쳐질때 극은 비현실적인 경계로 변질되며 지독한 이질감을 낳고 리얼함은 급속도로 퇴색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시비 붙은 연예인을 대상으로 과도한 '묻지마 범죄'나 '증오 범죄'를 하는 범죄자였다면 차라리 그럴싸했겠다. 인질범들의 정체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을 보면 납치 감금한 뒤 몸값을 요구하고 토막 살인도 서슴지 않는, 조직적인 범죄자 패거리다. 물론 극한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 장르인 만큼 범죄자들의 위험 수위가 쎌 수밖에 없겠으나, 그로 인해 도리어 리얼리티를 베이스로 한 영화의 몰입도는 깨진다. 

 


이 인질범 패거리들이 범행에 사용하는 도구는 특히 더 현실성이 없다. 대한민국의 인질범들이 손쉽게 사용하는 사제 총과 폭탄이라는 부조화. 게다가 범인들 캐릭터 면면이 드러날수록 매우 허구적이고 과장돼 있다. 대낮부터 편의점에서 살육을 저지르거나, 경찰에 잡혔을 때도 사제 폭탄을 터뜨려 유유히 빠져나오는 행위는 도무지 리얼리즘을 찾아보기 어렵다. 무자비한 패거리 보스, 그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거구, 열등감을 드러내는 2인자, 그의 연인, 모자란 조수까지. 너무도 영화적인 캐릭터이며 이런 류의 장르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범죄자 패거리의 전형이다. 즉, 배우 황정민만이 실제 실존하는 인물로 구체화돼 존재하고 주변 인물과 상황 설정들은 지나치게 과도한 비현실성을 갖고 한데 어울리지 못한다. 


영화는 황정민, 인질범, 경찰로 이어지는 삼각구도의 스토리 전개를 따른다. 그러나 인질범들간의 균열 과정은 이런 류의 장르물에서 그리 새로운 갈등 구도는 아니다. 또한 경찰들은 제 몫을 하다가도 중요한 순간마다 초를 치거나 삐끗한다. 결국 극한 탈주도, 사건 종결도 황정민이 다 한다. 배우 황정민이 절박한 위기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모습들은 분명 영화의 재미요소다. 하지만 '인질'이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란 타이틀을 내세웠다면, 이같은 판타지적인 결말은 도리어 쾌감과 안도를 느끼기보다 허무맹랑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인질' 속 황정민은 슈퍼맨이 아님에도 이건 마치 '베테랑' 서도철의 사건 해결 스토리를 보는 듯하다. '진짜 황정민이라면 어땠을까'라는 사실성에 기반한 환상을 창조하기보단, 이제껏 황정민이 각종 영화에서 보였던 캐릭터의 연장선으로 극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이처럼 '인질'은 리얼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현실성을 주기보다, 극명하게 대립을 이룬다. '황정민이 납치됐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대한 관객의 공감과 이입은 결국 '배우 황정민'이 극 중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거리감으로 변질되며 초반 퍽 흥미롭고 그럴싸해보였던 '리얼리티 탈주극'의 한계를 드러낸다. 리얼리티 베이스를 고집하다 도리어 독이 됐다. 이 영화의 관건은, 관객이 리얼과 허구라는 경계에서 얼마나, 어느 쪽에 몰입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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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감성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오히려 '실제 황정민'이란 설정을 배제했다면, 잘 빠진 납치 스릴러물로 평가받을 작품이다. 납치 신과 지하실 감금, 탈주 신 등에 사용된 핸드헬드 기법과 카체이싱 추격전 등의 생동감이 날 것 그대로의 감성이다. 특히 황정민이 목숨 건 탈주를 감행하는 신은 호흡을 그대로 따라가는 원테이크 촬영이 돋보이는데, 이 장면은 황정민의 연기 또한 꽤 인상적이다. 잘 짜인 액션이 아닌, 살고자 하는 의지로 가파른 산과 낭떠러지를 절박하게 뛰고 구르던 그가 찰나에 담아낸 떨림은 그가 느낀 피로와 공포, 처절한 생존 의지를 드리우며 전율을 준다. 


다섯 명의 인질범들과 경찰 캐릭터들은 몰입감을 주기 위해 낯설고 생소한 배우로 포진했다는 설명처럼, 새로운 인물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리얼 납치극'이란 프레임만 거둬내면 몹시 볼만하다.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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