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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기억과의 조우 '남매의 여름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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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0-08-2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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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낡은 사진첩을 꺼내어, 오래된 추억을 떠올린 듯하다. 시간 흐른 줄도 모르고 빠져드는 아련하고 먹먹한 옛이야기들은 잠시 잊고 살던 다양한 감성을 되살리며 향수를 자극한다. 아주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하며 잔잔한 여운을 드리우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감독 윤단비)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방학 동안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 남매 옥주와 동주의 어느 여름 이야기다. 반지하 집을 나와 아빠의 봉고차에 조촐한 짐을 싣고 길을 떠나는 남매, 라디오에선 임아영이 부른 '미련'이 울려 퍼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낡은 2층 양옥집이다. 


사춘기 누나 옥주는 무뚝뚝하고 말수 없는 할아버지가 낯선 반면, 막내 동주는 새로운 곳으로 와서 마냥 들떠있다. 여기에 한동안 못 만났던 고모까지 합세하며 오랫동안 조용했던 2층 양옥집이 시끌벅적해진다. 그렇게 남매의 여름은 시작된다. 


극은 특별한 영화적 사건이나 장치가 없다. 다만 어딘가 익숙한 동네, 어디선가 봤음직한 보통의 인물들의 일상을 섬세하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담아낸다. 


엄마와 이혼한 아빠는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다마스로 용달 일과 '짝퉁' 신발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가장으로서 노력하고, 남매에겐 늘 친구 같은 아빠다. 따뜻하고 정 많은 고모는 사춘기 소녀 옥주의 고민거리를 들어주거나 동주와 함께 요리를 만들며 가족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할아버지는 연락이 뜸했던 아들 딸과 손주들을 보고 반가운 내색을 드러내는 정 많은 이는 아니지만, 집안에 스며드는 온기에 슬핏 미소를 짓는 모습만으로도 뭉클함을 불러일으킨다. 


이 보통의 가족들은 함께 모여 그저 밥을 먹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각각의 사건을 겪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하게 여름의 시간이 흘러간다. 그럼에도 이 가족들의 일상에 빠져들게 되는 건,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과 익숙한 기시감 때문이다. 


이 가족의 관찰자이면서 화자인 옥주는 낯선 할아버지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2층 방을 자신의 방으로 꾸미고 그 해 여름에 차츰 익숙해진다. 남자 친구와 외모 때문에 고민을 하기도 하고, 엄마를 만나고 온 동생과 한바탕 싸우다 눈물을 터뜨리기도 한다. 아빠에 대한 의리와 미안함 그러면서도 겉으로 내색 못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라 할아버지 생일 선물도 쭈뼛대며 건네지만, 제가 준 모자를 쓰고 마당을 돌보는 할아버지를 보며 수줍고 기쁜 미소를 짓는다. 


특히 어느 밤 거실에서 홀로 전축을 들으며 미소 짓는 할아버지를 보고 차마 다가가진 못하면서도, 계단에 조용히 앉아 함께 노래를 듣는 옥주의 모습은 따스하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감정적 교감을 형성한다. 이때 흐르는 장현의 '미련'은 초반 남매가 할아버지 집에 오는 길 라디오에서 울려 퍼진 노래와 맞닿으며 다정한 관계의 연결성을 나타낸다. 


누나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누나 뒤를 졸졸 쫓고, 미안하단 누나의 사과에 되레 싸운 적이 있었느냐고 능청을 떠는 착한 막내 동주는 할아버지와 텃밭을 함께 가꾸기도 하고 아빠와 장난을 치며 가족들을 위해 재롱을 부리는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다. 


'남매의 여름밤'은 옥주, 동주 외에도 아빠와 고모 남매의 그 해 여름도 함께 담아낸다. 아빠는 어린 시절 무뚝뚝했던 할아버지가 제게 무심하게 친 장난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기도 하고, 고모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한다. 이 어른 남매는 건강이 좋지 못한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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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건이 아닌 인물에 초점을 기울인 영화는 여느 가족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현실적인 모습들을 담아낸다. 이는 너무도 일상적인 보편적 경험과 정서적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친밀하고 진솔된 가족의 관계성은 그 자체로 다정한 온기를 지니며, 그 어떤 기교 없이도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킨다. 


그 해 여름의 끝자락, 이들 가족에겐 하나의 큰 변화가 자연스레 일어난다. 영화는 내내 유지했던 기조대로 호들갑스럽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가족의 변화와 성장을 담아낸다. 이 가족이 함께 나눈 소중한 여름의 기억은 인생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아, 앞으로도 이들을 지탱하는 삶의 큰 조각이 됐다. 


곳곳에 오랜 삶의 흔적이 묻은 양옥집부터, 동네 슈퍼의 작은 평상까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장센이 아련한 감성을 극대화한다. 다양한 목소리로 영화를 휘감는 신중현의 '미련' OST는 잔잔하면서도 때론 울컥한 여운과 잔상을 오래도록 남긴다. "지나가 버린 시간들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 성장을 하며 느낀 아픔들"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며 추억에 젖게 하는 소중한 가족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다. 8월 20일 개봉.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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