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이성민, 감쪽같이 살아 숨 쉰 80대 노인의 숨결 [인터뷰]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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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이성민, 감쪽같이 살아 숨 쉰 80대 노인의 숨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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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2-10-2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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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정한 허리와 어깨, 거친 호흡과 느린 걸음걸이, 얼굴에 핀 주름과 검버섯,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담긴 목소리. 평생을 간직한 치욕과 통한의 처절함까지. 80대 노인이 된 이성민의 낯설고 기묘한 모습은 몹시 감쪽같아서, 놀라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시금 탄복하게 하는 연기력이다. 


은퇴 후 오랫동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알바' 중인 80대 노인 필주. 젊은이들과 서로 스스럼없이 영어 이름을 부르고, 산타 분장을 한 채 생일을 맞은 꼬마 손님에게 화려한 탬버린 댄스를 선보이는 '인싸' 할아버지다. 하지만 알츠하이머가 진행 중인 그는 더 늦기 전에 평생의 염원으로 간직한 과업을 끝내려 한다. 어린 시절 제 부모와 형, 누이를 모두 죽인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 60여 년 동안 처절하고 철저히 계획한 복수극의 시작이다. 


'80대 노인의 친일파 숙청기'라는 영화 '리멤버'의 키워드는 여간 파격적이고 흥미로울 수가 없다. 그동안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은 많았지만,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시적인 틀을 벗어나 개인의 복수극으로 그려진 영화는 몹시 이색적이다. 무엇보다 노인의 복수란 이질적인 극의 형태를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배우의 몫이 가장 중요한 영화기도 했다. 감독의 캐스팅은 탁월했다. 세월이 묻어나는 흐릿하고 탁한 동공, 주름진 손의 튀어나온 혈관까지 완벽한 노인의 모습을 연기한 이성민이다. 이같은 평가에 그는 특유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제법 듣기 좋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숱한 역할과 다른 얼굴을 연기해왔던 그에게도 80대 노인이라는 설정은 부담스러운 도전이었다. "배우로서 매력적인 작업이기도 했지만, 이질감이 들면 몰입에 방해되니까 부담이 많이 됐고 이를 극복하려 많은 노력을 했다"는 그는 "제가 원래 주름이 없어 주름잡느라 더 힘들었다"며 너스레다. 하지만 캐릭터의 외모뿐만 아니라 외형, 움직임, 말투까지 노인의 모습이 되려 했고 그러다 보니 평소 일상까지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하는 바람에 목 디스크가 오기도 했다고. 그 탓에 실감 그 이상의 리얼리티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핵인싸 알바생 할배'의 유쾌하고 밝은 모습부터, 60여 년을 기다리고 계획했던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그의 담담함. 그 속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원통함까지 이성민은 필주라는 인물의 다양한 이면과 감정을 감쪽같이 소화해낸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양반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인을 했었고 베트남 참전까지 했다. 군인으로서의 모습과 눈빛, 그리고 알바생으로 있을 때의 친근함을 각각 보여주는데 중점을 뒀다"고 캐릭터를 설명했다. 


그가 말하길 필주의 친일파 숙청기는 역사적인 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행동이 아닌 가족에 대한 복수다. 오히려 그 지점이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그때의 친일파들은 현재 사회 지도층의 명예와 부까지 거머쥔 채 살아간다. "그것이 필주에겐 더 고통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필주는 이에 대해 무기력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60년 동안 그들을 처단할 계획을 끊임없이 짜 왔었고, 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오면서도 감히 실행할 수 없었던 건 가족들 때문이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자신의 기억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그 일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만약 필주처럼 가족을 모두 잃었고, 이를 60년 동안 품고 있었다면 나도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까. 그런 지점에서 필주 캐릭터에 더 많은 공감을 했다." 최근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던 그는 객관적으로 캐릭터에 몰입하는 바람에, 제가 찍은 영화임에도 울컥하고 눈물이 터질 정도였단다. "창피할 것 같아 많이 참았다"고 너스레지만, 이토록 한 인물의 서사에 가슴 깊은 공감을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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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액션도 꽤 애를 먹었다. 빠른 액션에 익숙한데 속도를 줄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구사하는 게 영 어색한 탓이었다. "무술팀도 지금까지 한 것 중에 가장 힘들었다고 하더라." 극 중 이성민의 살생부(?) 리스트였던 친일 부역자 4인방, 박근형 송영창 문창길 박병호와의 호흡은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워낙 존경하는 분들인데, 함께 연기하며 선생님들이 너무 적극적이시고 의욕적이셨다. 보며 자극이 됐고 더 존경스러웠다"고.


80대 노인의 복수극, 여기에 빌런들도 같은 노인들이란 점도 영화의 묘미다. 영화 속 빌런들이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치가 떨리는 궤변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같은 이념과 논쟁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야기가 아닌, 과거 가족을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복수극을 통해 도리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더불어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필주의 복수극에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그의 절친이자 20대 청년 인규(남주혁)의 시선과 생각은 현시점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창구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인규 캐릭터가 중요했단 이성민이다. "필주는 이 여정을 가야 하는 명분이 확실하다. 누가 뜯어말려도 정확히 가야 한다. 인규는 그렇지 않다. 인규는 관객이 이 영화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다. 젊은 세대,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물의 시선으로 관객이 이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캐릭터라, 이 영화의 몰입을 만드는 건 필주가 아닌 인규였다"는 설명이다. 


사실 그는 또 이런 영화냐는 반응이 나올까 걱정하기도 했다.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역사적 단죄, 정치권에서 반복되는 친일 논쟁들을 볼땐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리멤버'를 택한 그의 이유는 분명했다. "그 시대를 겪은 노인, 그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진 현재의 젊은 아이가 이를 공감하고 동행해주는 이야기가 가장 좋았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이들이 화해하고 공감하고 동행할 수 있는 바람을 담은 영화다. 그 시대를 겪지 않았어도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다. 일제강점기든, 6.25든, 민주항쟁이든, 역사의 어떤 큰 격변기를 겪은 분들에 대한 우리의 공감과 존중이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가 같이 공감하고 이해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이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평생 잊고 싶지 않은 '기억'에 대해 "내가 배우였다는 것"이라는, 멋스러운 답변을 내놓는 그였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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