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 달림에 매료된 강제규 감독의 진심 [인터뷰]
최초의 한국형 첩보 액션 '쉬리'와 역대 두 번째 천만 관객을 동원한 블록버스터의 시초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 영화사의 거대한 획을 그은 강제규 감독. 그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작품은 오래도록 공들인 마라톤 영화 '1947 보스톤'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는 영광과 환희를 누리기보다 고개를 떨군 비참한 얼굴로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렸다. 그리고 그의 금메달보다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월계수 화분이 부러웠다 말하는 동메달리스트까지. 비극의 시대 민족 영웅이었던 손기정 선수와 지금껏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남승룡 선수. 그리고 그들이 발굴한 제자 서윤복이 해방 이후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대회에 나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생생히 담은 영화 '1947 보스톤'.
해방 이후, 여전히 혼란스럽고 가난과 설움이 가득한 나라. 운동화 한 켤레 살 돈 없지만 후배들을 키우려 노력했던 두 메달리스트가 신예 서윤복과 함께 기적처럼 이뤄낸 환희와 자긍심의 순간. 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실화를 처음 접한 강제규 감독은 "나름 스포츠, 특히 마라톤 영화들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웠다"고 했다. "정말 사실이냐 할 정도로 잘 짜인 실화였다. 주변 스토리도 무궁무진했고,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엄청나더라. 드라마로 10부작은 만들어도 될 만큼 재밌는 이야기였다"고.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 여겼고 뭉클한 감상도 들었단 감독이다. 하지만 영화 준비를 하며 우려의 시선을 많이도 받았다. "투자자나 주변 분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옛날 이야기엔 관심 없고 잘 안 보려 한다고. 게다가 마라톤이라니, 더욱 관심을 가질리 없다"는 견해들이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 기적 같은 실화에 뜨거움을 느꼈고, 찍고 싶은 열망이 더 컸다. "이야기의 본질을 바꿀 순 없다. 역사에 관심 갖고 이걸 봐야 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영화에 거부감을 덜 갖게 하고 자연스레 이 시대의 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했다"는 감독은 "실화를 얼마나 충실하게 잘 구현해 낼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세 분이 한 팀을 이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어떻게 달려가는지"를 치우치지 않고 그려내는 것에 집중했다.
해방 이후에도 독립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엾고 비참한 민족의 울분을 표현하는 마라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던 마라토너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값지고 의미깊다. 특히 가난과 설움, 무시와 조롱을 견디며 이뤄낸 이들의 값진 승리는 실화기에 더욱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긴다. 강제규 감독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도 힘과 용기를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고 싶었다고 진심을 전했다. '1947 보스톤'은 절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민족 자긍심이 고취되는 실화이지만, 감독은 관객에 자칫 '국뽕'이란 과잉 감정을 일으킬까 고심하기도 했다. "이번에 연출하며 되게 조심한 부분이다. 관객들이 그런 부담을 갖지 않도록, 과유불급을 되새겼다. 이미 벌어진 팩트 자체가 드라마틱하기에 여기에 힘을 싣게 되면 강요가 되고 부담이 되는 거라 생각하며 최대한 절제했다"고. 다만, "가공과 비가공의 차이 같다.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얘기를 비틀고 만들어내서 강요하는 건 나쁜 '국뽕' 같다. 민족감을 고양시키려 뭔가를 과장되게 만들어내지 않고 있는 사실을 담대하게 그리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착한 '국뽕' 아닐까"하는 마음이다.
워낙 실화가 드라마틱해서 영화적 과장을 심하게 부린게 아니냐는 오해를 살까도 걱정이었다. 이를테면 마라톤을 관람하던 시민이 목줄을 놓쳐 레이스에 개가 난입하고 이로 인해 서윤복 선수의 페이스가 무너지게 되는 최대의 위기 신이다. 이 또한 실화였다.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실질적인 에피소드가 많다. 신발끈이 풀렸는데 묶을 시간이 없어 물을 부어 최대한 신발이 쪼여지게 하려 했던 것도 실화"라는 감독의 귀띔이다.
'자칫 단조롭고, 지루할 수 있는 마라톤 경기를 어떻게 잘 농축해서 중요한 포인트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는 당시 감독이 가진 최대의 고민이었다. 선수와 선수간의 갈등, 오르막 내리막 등이 펼쳐진 레이스의 변형, 마라토너들의 전략과 작전, 다양한 시각적 비주얼 등 복합적인 요소들을 염두하며 "관객도 함께 마라톤을 달리는 심정으로 감상할 수 있게"끔 했다. 덕분에 드라마틱하며 박진감 넘치는 마라톤 경기가 완성됐고, 그 생생한 현장감은 가슴 벅찬 카타르시스와 뜨거운 울림을 선사한다.
대학 시절 '불의 전차'를 보며 달림에 매료됐고, 달리는 영화를 찍고 싶던 꿈을 비로소 이룬 강제규 감독이다. 그의 뜨거운 진심이 가득 담긴 영화다. 특히 감독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본질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각자 맡은 소임을 열심히 하는 것, 자신의 꿈과 노력 결정들을 실현시키고자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절 여러 가지 혼란과 가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세 선수는 달리는 사람으로서 이를 통해 꿈을 성취하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이상을 품지 않았을까. 그들의 정신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동력이자 힘이라는 걸 많은 분들이 느껴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강제규 감독은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한국 영화가 시장 점유율 10%일 때부터 영화를 시작했기에 한국 영화의 명암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지금까지 오고 있는 사람이다. 당시 무엇을 극복하고 진화해야 할리우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당당히 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까를, 독립투사도 아닌데 참 많이도 고민했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도, 스스로에 대한 도전과 극복을 통해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게 됐고 좋은 결과로 이어져 감사했다"는 소회다. 코로나와 OTT 산업의 성장 등으로 어려워진 한국 영화계 현실이지만 "그동안 후배들이 일취월장하며 일궈낸 큰 성장이 있었고, 늘 파도처럼 좋을 때가 있으면 어려움도 있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해 내는 것. 다른 드라마나 콘텐츠가 흉내 낼 수 없는 두 시간의 압축미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만의 특권을 작품에 잘 녹여내는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다. '쉬리'를 보며 감독의 꿈을 꿨다 말하는 이들, 해외에서 한국사를 가리킬 때 교본처럼 소개되는 '태극기 휘날리며' 등. 이런 일화들을 겪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단 감독이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그는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중이다. 이는 강제규 감독이 안주하지 않고, 도태되지 않는 이유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