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보' 성동일, 신뢰 가는 연기 기술자 [인터뷰]
배우 성동일은 절더러 연기자가 아니라 돈 버는 기술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지만, 그는 연륜에 기대 허투루 연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늘 관객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진짜' 배우의 너스레는 언제나 인간미 넘치고 정겹다.
사채업자가 얼떨결에 담보로 맡게 된 9살 소녀와 새로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힐링 무비 '담보'(감독 강대규)에서 성동일은 거칠고 까칠한 사채업자 두석을 맡았다. 험상궂은 생김새나 무뚝뚝한 말투와는 달리 실은 그리 모질지 못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남의 빚을 갚아주는 사람 냄새나는 사채업자 두석. 이처럼 까칠한 듯해도 마음 따뜻한 캐릭터에 성동일보다 더 제격인 배우가 또 있을까. 그 역시도 온갖 너스레와 익살로 자신을 낮추고, 주변 사람들을 핀잔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격의 없이 사람을 살피고 챙긴다는 건 대중도 익히 안다.
성동일도 이번 영화가 크게 마음에 와 닿았다. 익히 알려진 제 가정사를 봤을 때 인물이 절로 이해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았기 때문이다. "전 그렇게 똑똑한 배우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참고할 인물을 찾는다. 담보로 맡은 아이를 키우게 되는 건 버려진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컸다. 극 중 편집이 된 흐름이 많지만, 두석 또한 어린 시절 버림받은 전사가 있다"고 설명한 그는 "또 지금 저도 자식 셋을 키우는 가장이다 보니 지금이라도 제가 없다면 우리 애들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할 수 없이 아찔했다"고 털어놨다.
고작 아홉 살, 사회에서 아무것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아이의 상황이 가엾고 안타까워 촬영하며 울컥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기할 땐 절대 울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제가 울어버리면 주변 배우나 관객이 할게 없어진다. 끝까지 감정을 누르며 촬영했다"고. 그럼에도 참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부잣집으로 입양 간 줄 알았던 아이가 알고 보니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는 설정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막둥이 딸이 딱 그 정도 나이기에 더 몰입감이 셌다. 그래도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 감정을 조절하고 또 조절했단 성동일이다. "저는 극 중 중간 다리에 있는 인물이다. 배가 출렁거리면 전체가 위험해진다. 저는 평평한 땅과 다리처럼 있어야 했다"며 그렇기에 크게 흔들려선 안 된다고 스스로 주의를 줬다. 특유의 익살 덕에 언제나 연기도 주어진대로 능청스럽게 술술 해낼 것 같지만, 성동일은 이처럼 치밀하고 디테일한 노력을 기울이는 배우다.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요즘처럼 사는 게 어려운 시절에 이런 따뜻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단 성동일이다. '아빠는 우리가 보는 영화는 왜 안 찍냐'는 세 자녀들에게도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서 더 만족스러웠다. 실제 아내와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온 뒤 "아빠 연기 많이 늘었다"는 익살스러운 평부터, "재밌게 잘 봤다"는 듬직한 준이와 하도 울어 영화를 보다 엄마 옆으로 옮겨 앉았다는 막둥이 비하인드까지 훈훈한 가족의 정이 엿보였다. 물론 영화적으로 아쉬운 지점도 있다. 아이의 성장 과정이 빠르게 담기다 보니 서사가 끊기는 신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컨테이너에 두고 간 신발을 발견하고 회상에 잠기며, 어린 두석이 자신을 버린 엄마를 마을 입구에서 해가 다 질 동안 기다리는 신. 아이를 팔아넘긴 브로커를 찾으러 다니는 액션 신 등 인물의 감정선에 동화 작용을 일으키는 신들이 알고 보니 통으로 편집됐다. 이에 "아쉽긴 해도 시간의 제약이 있으니 설명적인 부분들을 어쩔 수 없이 편집한 것"이란 성동일은 두석이 그저 "성질대로 움직이는 양아치"처럼 보이지 않을까 염려했단다. 하지만 무뚝뚝하고 굳은 표정과는 달리 아이를 향한 두석의 눈빛엔 연민과 애틋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특히 초라하고 볼품없는 뒷모습과 걸음걸이만으로 묻어나는 '아버지'의 세월의 무게는 그 자체로 눈시울을 적셨다. 성동일의 연기야말로 당위성 그 자체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저는 이번에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역할이라, 제 역할이 가장 쉬웠다. 희원이한테 영화가 달렸으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고 했다"며 자신을 낮추고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 김희원을 챙긴다. 그는 "제가 작품 분석을 잘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희원이는 잔정이 많고 일상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 이번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은 희원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표현에 인색한 두석의 구박에 늘 구시렁 대면서도 그를 믿고 따르는 사채업자 종배를 연기한 김희원과는 앞서 예능에서부터 남다른 '케미'를 입증한 바 있다. 그는 "관계 설정이 중요한데 희원에 대한 믿음이 있어 촬영 내내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며 찍었다"며 "희원이가 되게 웃기고 착하고 정이 많다"며 후배 자랑에 여념이 없다. 본인 또한 참 정 많은 사람이다.
주조연의 경계 없이 넘나들지만 성동일이 작품을 택하는 기준은 하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는 제가 큰 역할을 맡는 걸 불안해한다. 실제 돈 벌기엔 출연료는 같으니 신을 적게 찍는 게 낫다. 저도 회당 세 신 정도 나올 때 연기가 가장 좋다"며 능청을 떨지만 "간혹 사람들이 의아해하더라. 주인공을 줘도 안 한다 하고, 그래 놓고 어디 가서 우정출연으로 한 신만 찍고 또 그러다가 메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혹자는 한번 주연한 사람이 단역을 어떻게 하느냐고 한다. 전 상관없다"는 그다. 그가 말하길 누가 알아봐 준다고 좋아하고, 대중의 환호에 미쳐 날뛸 나익 아니다. 그저 사람 만나고 그들과 함께 연기하길 즐길 뿐이다. "제 모티브는 우등상은 못 받더라도 개근상은 받자는 것이다. 성적이 나쁘더라도 배우로서 쉬지 않고 가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는 성동일은 천생 연기를 즐기는 배우이자 노련미를 갖춘 성실하고 믿음직한 연기 기술자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