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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솜 "I LOVE MY SELF" [인터뷰]

    멋과 개성이 넘친다. "I LOVE MY SELF", 자신을 믿고 사랑하기에 매사 밝고 자신감이 넘칠 테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섬세함과 진중함을 지닌, 배우 이솜이다.  까칠한 성격에 돌직구. 고졸 사원들이 토익 800점을 넘으면 대리 진급을 시켜준다며 개설한 토익반 공고에도 정리해고를 하려는 수작이라며 초를 친다. 마케팅 아이디어가 넘쳐나지만 현실은 선배에게 아이디어 뺏겨, 부서원들에 햄버거나 사다 바치는 보조다. 남들은 '싸가지'라고 해도 실은 누구보다 의리파인 유나는 추리소설 마니아의 특기를 살려 절친 동기들과 함께 회사 비리를 파헤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에서 이솜의 매력은 제대로 빛을 발한다. 과감하고 세련된 패션 스타일링은 물론 사탕발림 다 내려놓은 돌직구의 현실 직시, 하지만 어려워도 친구가 가고자 하는 길을 함께 가는 진한 우정을 지닌 '걸 크러쉬' 파워 때문이다.  정작 이솜은 유나 캐릭터를 보고 고민이 컸단다. 겉으론 강하고 화려해 보이며 할 말 다하는 성격이지만, 그 이면에 정서적인 부분을 어떻게 담아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대본만 봤을 땐 "말 많고, 아는 척하고 겉도는 얘기만 하는" 아이였다. 왜 그럴까 고민했고 결국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넣어보자고 감독에 제안했다. 유나는 겉보기와는 달리 자기 자신보다 주변을 더 생각한다. 친구들한텐 강해 보이고 늘 돌직구만 날려서 힘 빠지게 만들지만, 직장에선 상사한테 찍소리 못하고 긴장하는 모습 등 정서적인 면을 자연스레 부각하려 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깊이 고민했다. '오지랖' 넓고 여리면서도 올곧은 자영(고아성), 느릿하고 차분하지만 '수학천재' 보람(박혜수). 너무도 다른 세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친해졌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직장 상사에 모욕적인 말을 듣고 포장마차에서 보람에게 털어놓으며 울다가, 멀리서 자영이 오자 "이자영한텐 말하지 마"라며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대사를 넣었다. 이는 유나와 보람, 자영의 관계를 형성하는 대사였다. 이솜은 이처럼 캐릭터의 내면을 꼼꼼히 연구하며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변화시켰다.  이솜의 이같은 캐릭터 탐구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는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극 중 말단 고졸 동료 송소라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설정했다. "옥상에서 작당질을 할 때 송소라가 나타나는데 그때 촬영과 조명, 구도까지 완벽했다. 만화적으로 잘 표현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솜은 실제 송소라와의 관계를 만화 '슬램덩크'로 설정했다. 유나는 강백호, 송소라는 서태웅이다. 아무리 잘하려고 발버둥 쳐도 서태웅을 이기지 못해 분하고 오히려 그 앞에서 까불대며 뻐기는 것이다. 이솜은 "송소라와 라이벌이지만, 그가 더 위에 있단 설정을 잡고 싶었다. 그런 캐릭터 구도와 뉘앙스를 많이 신경 썼다"고 귀띔했다.  '쌉쌍바'라고 유나가 늘 내뱉는 귀여운 욕설도 눈에 띄는 대사다. 이솜은 "다들 제가 욕을 잘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진짜 못한다. 어설프게 한다. 그런데 촬영할 때 한 번에 오케이가 나더라"며 민망해한다. 영화에선 나오지 않지만, 회사 비리를 파헤치는 일에 동참해준 친구들에게 자영이 고맙고 미안하다고 얘기할 때, "아냐. 난 널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 내 기분이 좋다"라고 유나가 말하며 흥얼거리는 노래는 직접 가사와 멜로디를 써서 준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편집됐다고. 그러면서 즉석에서 그 노래를 불러주는 이솜이다. 이처럼 연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과 순수한 열정이 가득하다. 유독 이번 캐릭터가 그랬단다. 여성 또래 배우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이 없었기에 더 열심히 준비해서 잘하고 싶었다고.  고아성, 박혜수와 함께 합숙도 했다. "아무리 촬영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잤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만들어간 영화다. 모니터를 볼 때 각자 개성 있는 친구들이 정말 사이가 좋고 돈독하구나 느껴져서 좋았다"는 그다. 셋이 함께 있으면 그저 좋았단다. "한 명이라도 없으면 완전체 느낌이 안 났다. 가장 좋아하는 신이 회사 출근하는 장면에서 각자 캐릭터 소개가 지나가고 보람이 넘어졌을 때 다 같이 일으켜주는 모습이다. 참 친근해 보인단 생각이 들더라."    이솜은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담고 있음에도 세 친구들이 흥미롭고 신나게 풀어내는 과정이 좋았고, 무엇보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즐거웠다. "그 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로는 유나가 가장 적합하단 생각이 들었기에 제대로 하고 싶었고 신나게 준비했다"고. 모두가 공감할만한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옛날 영상들을 찾아봤고,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도 찾아봤다. 지금보다 더 과감하고 화려한 스타일링이 멋스러웠다. 본인도 모델일을 했어서 그런지 의상과 메이크업에는 의견을 많이 냈다. 사진 속 엄마가 입은 옷을 그대로 소화해서 입은 것도 있다. 검정 목폴라에 묵직한 골드 목걸이를 매치하고 가죽 치마를 착용한 패션이다. "엄마의 패션을 그대로 꼭 한번 입었으면 좋겠단 생각에 입게 됐다"지만, 정작 엄마에겐 쑥스러워 말을 안 했단다.  겉모습부터 내면까지 화려하고 당차지만, 속 정 깊은 유나 그 자체였던 이솜이다. 10년 전 인연이 있던 감독은 애초부터 이솜을 염두하고 유나 캐릭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솜은 "유나와 조금은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다. 유나만큼 많이 알지도 못하고, 할 말을 하지도 못한다. 일할 때는 명확하게 얘기하는 편이지만, 요 근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자주 해서 저를 그렇게 봐주시는 것 같다. 스스로 그런 사람인지 물으면 맞다고 대답할 순 없을 것 같다. 주체적이고 싶어 하는 여성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유나를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느끼기에도 완성된 유나의 모습은 친구들을 위해 정의로운 일을 나서서 할 수 있는 굉장히 멋진 여성이었다. 이솜이 유나의 대사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아이 러브 마이 셀프"다. 그는 "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단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극 중 유나는 '싸가지'로 대변되지만, 실제 자신이라면 '고인물'이라고 불리지 않을까 싶단 이솜이다. 사실 유행을 잘 모르고, 카톡도 안 한다. 신조어나 최신 유행들도 이번에 고아성, 박혜수에게 알게 된 게 많기 때문이란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세 가지 단어들로 스스로를 정의하길 "나 스스로에게 냉정한, 친구들에겐 철없는, 어떤 면에선 까다로운 나"라고. 하지만 그런 자신을 사랑하는 "I LOVE MY SELF"를 되새긴다.  이솜에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2020년에 찾아온 90년대 영화란 굉장한 의미가 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잘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일을 사랑하는 거다. 그걸 또 느껴서 이번 영화를 계기로 일을, 그리고 나를 더 사랑하려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신과 일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이 누구보다 당당한 이유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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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박혜수의 강인함 [인터뷰]

    여리고 연약한 듯해 보여도, 내면의 올곧은 강인함이 있다. 맑고 곧은 심지를 갖고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는 배우 박혜수다.  버섯머리 숏 컷에 동그란 안경. 느릿하고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인 수학 천재. 가짜 영수증을 처리해 회계 장부 숫자를 맞추는 일을 하며 무료함을 느낀다. 무엇보다 숫자 가지고 거짓말하는 걸 참지 못하겠다. 그러다 "진짜 재밌는 일을 찾으라"는 직장 상사의 조언과 맞물려 절친 동기들과 회사의 폐수 유출 사건 조사에 뛰어든 뒤 큰 안경 뒤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 속 보람으로 변신한 박혜수는 긴 머리를 과감하게 잘라 난생처음 덥수룩한 바가지 머리 숏 컷에 커다란 안경, 매일 돌려 입는 튀지 않는 의상으로 외모부터 확 달라졌다. "다양한 역할 맡고 싶단 소망이 있었는데 외적으로도 개성 넘치게 표현된 캐릭터가 정말 좋았다. 이런 변신을 할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는 박혜수다. 이런 외모 변화만으로도 자신이 찾아봤던 90년대 영상 속 한 방청객의 모습 같았다며 흡족해한다. "90년대 모습을 보면 지금과는 또 다른 개개인의 개성이 존재했던 것 같다"는 박혜수는 이를 구현하는 것이 재밌었단다. 플레이 리스트를 90년대 노래로 빼곡히 채우고 들었다. "그 시절 바이브를 내 안에 만들어보자"는 의미였다. 잼, 빛과 소금, 서태지 노래 등등 그 시절의 노래가 정말 좋더란다. "제가 그 시절이 기억이 많이 나진 않지만 영상을 찾아보면 개개인의 개성이 정말 뚜렷하더라. 당시 음악도 개성이 넘친다. 이 시절을 성인으로 사는 것도 재밌겠단 생각이 들었다"는 그다. 박혜수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소심한 보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현실감 있게 그려지는가였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조용한 성격. 상대적으로 기운 센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주지만, 숫자와 관련된 계산을 할 땐 눈빛이 돌변하는 보람이다. 박혜수는 "말투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아이로 그리고 싶었다. 평소엔 혼자만의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친구지만, 가장 자신 있는 게 수학 얘기다. 숫자가 나오면 전문 분야라 돌변하는 느낌 내고 싶었고, 그때 머리가 가장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그 차이가 재밌게 그려진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보람이 각각 인물을 대할 때 차이를 뒀다. 가까운 친구들과 있을 때의 모습은 가장 보람의 실제 모습과 가깝고, 낯선 이들을 대할 땐 그 모습이 감춰진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특히 존경하고 의지했던 멘토이자 직장 상사인 봉 부장(김종수)을 대할 땐 보람의 성격상 티를 안 내지만 따뜻하고 멋진 어른이란 생각을 하며 의지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애썼다. 박혜수는 "연기하면서 점점 더 많이 느꼈다. 처음엔 인물을 만들 때 인물로 바로 접근했다. 하지만 그 인물을 완성하는데 외적인 부분도 있고, 시대적 배경도 있고, 시간적 설정도 있지만 주변 인물간의 관계가 얼마나 잘 표현되느냐에 따라 인물의 깊이감이 드러나더라"고 깨달음을 전한다.    8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는 고졸 출신 말단 사원 친구들이 서로 아끼고 의지하는 모습, 유쾌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당당히 미래를 향해 가는 모습은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한다. 박혜수는 고아성, 이솜과 쌓은 우정을 소중하게 여겼다. 박혜수는 "언니들과 개인적 고민, 인생에 대한 고민 등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서슴없이 얘기하고 의지할 수 있었다. 연기 경험으론 다 대선배들이지만 친구 같고 언니 같았다. 그러면서 일적으론 많은 도움을 줬다. 제 연기에 대해 스스로 혼란스러울 때마다 현장에서 언니들이 신뢰해주는 걸 보고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더라"며 "언니들이랑 있으면 제가 막내라 괜히 어리광도 더 피우고 기대게 되고, 언니들이 고민을 얘기해주면 저도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있구나 싶어서 행복했다"고 한다. 극 중 보람이 인생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보람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안타까워하며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 상사 봉 부장과의 '케미'도 소중했다. 박혜수는 "살면서 사회에 나와서 그런 힘이 되는 좋은 어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정말 감사하게도 실제 봉 부장님을 연기하신 종서 선배님은 좋은 어른이셨다. 처음 뵀을 때부터 저를 보람으로 생각해주시고 애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현장에서 의지를 많이 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직업이 매력적이라고 다시금 느꼈다. 이유는 "작품 하나 할 때마다 정말 많은 에너지를 쏟고 많은 고민을 통해 한 인물을 그리고 나면, 끝났을 때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게 느껴진다. 작품 할 때마다 많은 다른 모습들이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계속 연기하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좀 더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특히 "이번 영화 끝나고는 사람을 얻은 것이 정말 값졌다"고. 나 자신을, 그리고 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많이 배웠다. 박혜수가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가장 좋아한 대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였다. 자신이 그런 시기가 있었기에, 그 대사를 보고 '누구나 이런 시기가 있구나' 싶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많이 되더란다.  그가 말하길 그 전엔 시야가 좁았다. 연기를 잘하고 싶단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서 자신의 일상과 삶을 소홀히 했다. 연기가 재미없던 순간은 결코 없었다. 다만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다 보니 조금 멈추고 싶단 생각을 했다. 잠깐 쉬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는데 그러면서 시간과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을 너무 흘려보내는 건 아닌가, 나중에 이 시간이 후회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은 많았지만, 반드시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연기란 게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나로서 해야 된다. 그렇기에 제가 먼저 바로 서 있어야 했는데 제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시간을 통해 균형을 맞출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감과 에너지가 생겼단다. 그때 만난 게 바로 이 영화였다. 이 작품이 박혜수에 미친 영향은 특별했다. 그는 "실제로 살아가면서 '내가 왜 일을 하는가. 왜 나는 일을 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건 뭔가. 싫어하는 건 뭔가' 뚜렷하게 인식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다. 시대, 나이 불문하고 그런 고민들은 모두가 한 번쯤 해 봤을 고민들이고, 이를 고민하고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극 중 봉 부장님 말씀대로 "싫어하는 것부터 확실히 알고, 찾아가면서 재밌게 살면 된다"는 메시지가 제게 그랬듯 관객들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오디션 엄친딸 스타'란 데뷔 초반 타이틀은 어느새 사라지고 배우 박혜수 본연의 모습을 차근차근 확실하게 각인하는 중이다. "이제 좀 더 발전했고 성장한 모습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란 책임감이 막중하게 느껴진다"는 그는 "여전히 긴장되고 벅차지만, 예전처럼 저를 몰아세우기보다 잘 가고 있구나 조금은 격려하며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며 달려가야겠단 생각"이다. 스스로 자신은 잘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람이라 생각할 때가 있었다. 고아성은 '넌 정말 단단한 사람'이라고 얘기하더라. 왜 그렇게 봤을까 싶었다. 다시금 자신을 들여다보니 무너져도 다시 금방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무너져도 일어서고, 일어서고 하다 보니 실제로도 단단해지는 것 같단다. "앞으로도 제가 연기를 하고 나이 들수록 많은 일들을 마주치게 될 텐데 그것들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박혜수는 이미 강인한 사람이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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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도 없이' 운치있는 유재명 [인터뷰]

    '봄날의 낮술', '마치 가을 하늘 같은'. 배우 유재명이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를 두고 비유한 낭만적인 단어의 조합이다. 어느 날 낮술을 먹는데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해 질 녘 직전까지 먹는 낮술은 달고 맛있다. 살짜큰 취기가 올랐을 땐 무장해제되고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아침엔 서늘해도 낮엔 잔 더위가 가시지 않은, 시시각각 변하고 석양이 질 때면 붉게 물든 진한 색채감이 있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익숙한 듯 낯설고 새로운 느낌이다. 잔잔하고 섬세한 감성적 표현으로 새 작품을 만난 설렘을 표현하는 유재명의 운치란. 언제 봐도 멋스러운 그다.  트럭에서 달걀 파는 장사꾼. 허름한 옷차림에 한쪽 다리를 절지만 근면 성실하고 친숙한 입담을 지녀 거부감이 없다. 부업으로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하면서도 제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신앙심이 깊다. 동업자인 말없는 청년과 늘 함께다. 상대는 말 한마디 없는데 용케 감정을 읽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간다. 어느날 의도치않게 유괴된 아이를 맡게 되며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평범한 듯 결코 범상치않은 창복 캐릭터, 유재명은 그를 만나 설렘을 느꼈다. "접해보지 못한 기괴하고 이상하고 낯설고, 그런데도 궁금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특히 선과 악이 모호한 경계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처연하면서 웃기기도 했다. 유재명은 문득 '베를린 천사의 시'란 옛날 영화를 떠올렸다. 지상서 내려온 천사가 인간을 스쳐 지나가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판단이 쉽겠다. 하지만 인간은 몇 가지 정보만 취합해서 판단하기에 오해와 편견이 따를 수 있다. 보편적인 사회적 관점에서 범죄 조직에 하청을 받아 시체 처리를 하는 창복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편견을 깨고 오히려 주인공들을 평범하고 친근하게 다루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래서 더 낯설고 기묘했다"는 유재명은 이를 두고 "제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이었다고 밝힌다.  창복은 표면적으론 평범하다. 전문 직업군의 캐릭터라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디테일이 보일 텐데 평범함을 어떻게 표현할지가 관건이었다. 또 선악이 모호한 인물로 극을 끌고 가는 것이 중요했다. 유재명은 이같은 고심을 하며 인물을 탐구했다. 그가 말하길 창복은 생존이란 이름으로 시체 청소부 일을 선택했다. 사회적 약자기에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많진 않았겠지. 할 수 있는 게 달걀 파는 것이고. 시체 청소부 일을 선택하고 나선 많이 망설였겠다. 하면 안 된단 갈등도 있었을 테고. 그래도 돈은 돈이니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지는 말자. 누군가는 해야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시키며 악도 아닌, 선도 아닌 삶이란 경계에 머무른 인물"이라고 창복을 받아들인 유재명이다.  그러면서 또 문득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속 한 장면을 떠올린다. 잔인한 고문을 행하던 형사가 짜장면을 시킨 뒤 "저 집은 양파를 항상 적게 줘"라고 하던 대사. 유재명은 "그게 가장 공포스러운 거다. 사람을 고문하고 피 묻으 손을 닦으며 저런 평온한 모습을 띄는 것.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너무나 섬찟한 지점이잖나"라고 말했다.  '소리도 없이'도 마찬가지로 악의 평범성을 그린다. 범죄에 가담하거나 행하면서도 행위의 당위성을 찾는다. 누군가는 해야 되는 일이라고 합리화시키고, 살기 위해서라고 변명한다. 이를 두고 유재명은 "사회적 구조에서 약자로 살며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을 잘 포착했고, 삶의 주술적인 마인드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나. 그런 관점을 가진 영화더라"고 설명했다.    유재명은 창복에 재미있는 색깔을 입히고 싶었다. 관객이 부담 없이 인물을 따라가서 영화의 줄기를 재밌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면모, 소심한 성격 등을 잘 조합해내는 것이 제 몫이었다. 말 없는 태인을 대신해 많은 양의 대사를 하다 보니 리듬과 템포가 처지지 않게 하는 것이 제일 어려웠단 그다. 관객이 어떻게 보실까 걱정이라지만, 허공에 매달려 구타당하는 이의 현황을 "사망하고 계시는 중입니다"라고 하거나 다짜고짜 아이를 맡으란 요구에 "저희가 세상 떠나신 분들만 모시다 보니까"라며 난처해하는 창복의 천연덕스러운 말맛은 영화의 유쾌한 리듬감을 배가하는 요소였다.  이런 창복인만큼 애드리브도 상당했다. 하지만 "의도화된 즉흥적 대사들은 지양했다"는 그다. 자연스럽게 인물로 체화된 말들을 선호했다. 몸이 불편한 신체적 특성을 표현하는 건 익숙했다. 연극에서도 사회적 개념의 약자들을 그릴 때 이런 설정을 두기에 익숙하게 연기해 본 탓이다. 옷도 아무렇게 입어도 되고, 힘쓰는 연기도 아니라 오히려 편했단다.  논리적인 척, 정의로운 척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강요하는 어른의 모습도 하나의 연기 포인트였다. 얼떨결에 아이를 맡게 된 후 태인의 집으로 보내기 위해 늘어놓는 말들은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표현한 대사이기도 했다.  유재명은 이 작품을 통해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의 희열감과 더불어, 영화가 가진 테마를 곱씹었다. '나 역시도 누군가를 볼 때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진 않는지, 스스럼없이 나의 양심을 포기하면서 합리화를 시키며 살고 있진 않은지'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소리도 없이'는 자신에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고, 선악의 기준은 무엇이며, 뭐가 옳은 가치 판단인지 되묻게 하더라"고. 이처럼 작품을 통해 체화하고 성찰한다. 하지만 그는 "제가 말한 것처럼 관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망할 때가 많다"고 겸손이다.  연극 무대에서 나와 '응답하라 1988'의 동룡 아버지로 눈도장을 찍은 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명불허전 '믿고 보는 배우'로 각인된 유재명. 그 역시도 달라진 위치와 변화를 체감한다. 솔직히 겁이 나기도 하고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배우의 숙명이다. 대중의 판단과 평가, 이를 자양분으로 삼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게을러지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단 유재명이다. 작품을 통해, 개인의 일상을 통해 더 나은 사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고민하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진중함을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