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고아성은 지금 맑음 [인터뷰]
고아성은 현재 밝고 명랑하다. 지금의 밝음이 만족스럽다며 환하게 웃는 그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의 입사 8년 차 말단 여직원 이자영. 실무 능력은 완벽하지만 현실은 커피 타기 달인인 그는 토익 600점을 넘으면 대리로 승진해 진짜 '일'을 할 수 있단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회사의 폐수 무단방류 현장을 목격한 뒤 이를 동기들과 파헤치려 한다. 오지랖이라 해도 좋다. 일과 직장을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오지랖'이라고 불리는 자영. 고아성은 평소 말수도 적고 내성적인 편이라, 자신과는 다른 자영을 위해 의도적으로 스스로 바뀌려 노력했다. 촬영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당시 만났던 주변 사람들은 '정말 밝아졌다'는 얘기를 그렇게 하더란다. "MBTI 검사를 정기적으로 한다. 이 작품 하기 전엔 무조건 I(내향형)가 나왔는데, 이후 E(외향형)가 나오더라. 영화 찍다 보며 느끼게 됐다. 다음 영화 찍을 때까진 성격이 이렇게 간다. 이번 영화를 통해 바뀐 제 성격이 좋다. 주변 사람들도 밝아졌다고 좋아하시더라"며 저도 신기한 눈빛이다. 실제 고아성이 풍기는 분위기부터 발랄하고 통통 튀는 딱 그 또래들의 모습이었다. 환한 얼굴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조잘조잘 얘기하는 그 기운이 싱그럽다.
그 또한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명랑한 역할을 하고 싶단 바람이 있던 찰나, 이 작품을 만나게 됐다. 독특한 제목부터 새로웠고, 극이 밝고 명랑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안에 진중한 메시지도 담겼고 사회문제도 담겼다. 이종필 감독과도 이미 알던 사이였고,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감독이 진지한 편지를 한통 보냈단다. 91년도에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부터, 내부고발을 성공시킨 여성 직장인 얘기, 환경 문제 등을 빼곡히 쓴 정성이 가득한 편지. 그래서 감독에 얘기했다. "이렇게 진지하게 안 하셔도 이 영화 할 것"이라고. 감독은 이렇게 진지하게 안 하면 설득 안 당할 것 같아 그런 거라고 말했다. 사회적인 울림을 주는 작품들에 자주 출연했던 고아성이기에 감독의 '오지랖'이 작용된 모양이다. 고아성은 "그동안 딱히 의도해서 선택한 건 아닌데 돌이켜보면 부정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제가 그런 이야기에 많이 끌리는 것 같고, 감독님이나 작가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모습을 끌어내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닐까"라고 정의해본다.
결론은 밝은 작품을 하고 싶던 차에 또래 여배우들과 함께 의기투합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아 신나게 촬영할 수 있던 작품이다.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을 밝고 명랑하게 그려낸 영화의 톤 앤 매너도 흡족했다. 고아성은 "저희 영화가 참 알차다. 우정, 추리, 복수극, 승리 스토리 등 모든 게 다 담겼다. 또래 배우들과 친근하고 충만한 작업을 했다는 건 두고두고 뿌듯할 것 같고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 같다"며 기뻐한다. '싸가지'라고 불리지만 누구보다 의리파인 돌직구 유나(이솜),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 수학 천재 보람(박혜수)과의 극 중 '케미'는 스크린 밖에서도 여전하다.
작품을 통해 끈끈하고 돈독한 동료이자 친구를 만나게 된 이들이다. 고아성은 "처음 시나리오 읽을 때부터 세 배우의 합이 중요하겠단 생각에 이를 중점적으로 봤다. 누구 하나만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며 "처음 만나서 각자 우리가 어떻게 작품을 읽었는지 얘기를 나누는데 그때 정말 좋은 예감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셋이 합숙까지 하며 더욱 돈독해졌다. "솜 언니는 정말 큰 언니처럼 많이 챙겨주고 요리를 잘해줬다. 혜수는 막내인데 정신적 지주 같았다. 전 리액션 담당이었다"며 웃음을 자아낸 고아성은 "또래 배우들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다 누렸던 것 같다"고 충만한 행복감을 드러낸다.
세 사람이 붙는 신은 특히 다 좋았다. 지하철 장면을 찍을 땐 너무 감성에 젖어 눈물이 나기도 했단다. 그가 말하길 세 사람의 집 방향이 다 다르듯, 자영은 혼자서 비리를 목격했고 친구들은 처음엔 시큰둥하다. 혼자 속상해하며 '오지랖 많은 내가 참고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때 안 도와줄 것처럼 하던 친구들이 도와준다는 거다. 너무 고마워서 플랫폼 건너편에서 외치는데 그 지하철도 스크린 도어 없는 90년대의 지하철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 촬영 다음날이면 신식으로 바뀌는 공사가 들어간다. "뭔가 마지막 남은 장소에 대한 낭만도 겹쳤고, 참고 참다가 고맙다고 외치는데 두 사람에게 느끼는 진한 감정도 있었고 여러모로 엄청 젖어있었다"고. 이처럼 뭉클했던 신이 수두룩했다. 특히 친구들과 함께 행진하는 듯한 출근길 신은 한껏 격앙되고 떨렸다. "실제 이 거리에 이 사람들이 있었을 거란 실감이 났다"고 했다. 아직 서울에 남아있는 90년대 장소에 대한 낭만이 느껴졌고, 만약 저가 90년대에 청춘을 누렸더라면 그 출근길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하지만 작품을 통해 그 시절의 향수를 느껴본 것만으로도 기뻤다.
영화는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옛 시절의 낭만과 향수가 가득하지만, 한편으론 고졸, 여자 사원들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게 보인다. 고아성은 "촬영하며 그 공간에 들어섰을 때 말단 고졸 사원들을 구분하는 자주색 유니폼을 입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대열에서 차별이 느껴지더라. 제가 혼자 복도에 책상이 빠져서 개미 쳐다보는 신을 찍을 때도 너무 서운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 서운함을 담아서 터뜨릴 때 내면의 통쾌함이 있었다고 눈을 빛낸다.
남들은 자영더러 '오지랖'이라 하지만,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벌어진대도 옳은 길을 가야 한다고 믿는다. 고아성도 자영처럼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지는 마음이 뭔지 알았기에, 자영이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지 연민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마냥 착한 것 같지만, 자영은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친구들이 함께 였기에 가능했다며. 자영으로 살 수 있고, 자영의 성격을 새로 갖게 돼 기쁘단 고아성은 "실제 성격은 딱히 없는 것 같다. 내향적이고 외향적인 성향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제 원래 성격의 장점이라면, 공감을 잘한다는 거다. 너무 공감하면 힘들 때도 있고, 제 자신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을 잘 이해한다는 것이 저도 좋아하는 지점인 것 같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로 최연소 청룡영화상 신인상 타이틀을 획득한 고아성은 어느덧 23년 차 배우, 20대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하지만 대단한 타이틀은 정작 그에게 "잊고 살 때가 많은" 것이다. 작품 수가 많아져도 예전 작품을 보고 "잘 봤다"고 기억해주는 사람들, 배우로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연기했던 지점을 알아봐 주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저 반갑고 보람찰 뿐이다. "연기하며 기복이 심해진다. 이 작품에서 잘했다고 해도 다음 작품에서 잘한단 보장이 없다. 볼링이 유일하게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수 있는 스포츠라더라. 연기도 경력과 무관하게 한 순간의 판단으로 너무나 바뀌는 것 같아 사실 겁나지만, 잘 이어오고 있다. 제 연기의 원동력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이에 대한 지치지 않는 애정 때문인 것 같다."
"배우 하는 게 정말 행복하고 좋다"는 그의 표정에 행복과 밝음이 가득하게 차 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