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의 양지' 신수원 감독이 건네고픈 위로 [인터뷰]
좋은 어른은 못 돼도, 생각하는 어른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신수원 감독이 느낀 어른으로서의 부채감과 책임감이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만들게 했다. 여기엔 작은 위로라도 건네고픈 감독의 사려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카드 연체금을 받으러 갔다가 사라진 후 변사체로 발견된 실습생으로부터 매일 같이 날아오는 의문의 단서를 받게 되는 콜센터 센터장 세연의 이야기를 그린 극현실 미스터리 '젊은이의 양지'.
시작은 '구의역 김 군 사망 사고'였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2년 뒤였다. 19세란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내몰린 아이가 스크린도어 수리 중 전동차에 치여 숨진 끔찍한 사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 뉴스에서 그가 지닌 가방 안의 소지품들이 나왔다. 고작 컵라면, 나무젓가락, 그리고 공구들. "감정이 너무 짠하게 왔다. 이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단 생각이었다." 이후 방송에서 한 특집 기획을 봤다. 스무 살을 앞둔 19세 실습생들의 이야기였다. 무한한 경쟁과 냉혈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몰린 아이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접하고 신수원 감독은 결국 '젊은이의 양지'를 써 내려갔다. 영화 촬영 바로 직전, 산재로 숨진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의 사건을 접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마련한 정장을 입어보며 수줍어하던 청년의 모습이 그토록 가슴에 사무칠 수가 없었다. 영화를 완성해야 될 이유는 더 확고해졌다.
"나이를 먹다 보니 저절로 어른이 됐다. 아니 어른이라고 말한다. 살다 보니 나이는 먹었지만, 좋은 어른은 못됐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도 좋은 어른은 없다. 다만, 생각하며 사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먹고살기 힘들다며 모든 것에 문을 닫고 귀를 닫고 입을 막는 어른이고 싶지 않았다"는 감독은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조금은 이 어두운 세계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연을 중심으로 가는 이야기지만, 19세 실습생 준과 20대 취준생 미래 세 인물을 모두 담으며 감독 또한 모든 인물의 감정에 이입했다. 특히 감정을 섞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고3 때, 스무 살이 되기 두려웠던 기억들. 대학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하고 가기 싫은 기분. 세상 밖에 나가서도 새로운 울타리가 있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에 대한 귀찮음과 도망치고 싶은 기억들."
자신 또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갖고 있을게 분명했기에,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특히 더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직면해 있는 어려운 장애가, 내가 겪었던 것들과 또 다르더라.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고 출구가 막혀 있었다"고. 하지만 많은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겪은 경험의 가치만을 논하고, 흔히들 '라떼는 말야'라며 훈수를 두곤 한다. 감독 역시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있다"고 했다. 분명 그들도 불안한 시작을 겪었지만, 오래돼 까먹기도 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태도의 문제라고 했다. "저도 인간이다 보니 왜 저러나 이해를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나도 어쩔 수 없는 꼰대구나. 내 나이가 그렇게 만들었구나' 싶다. 하지만 결국 들여다보면 이해가 된다. 결국 공감하려는 태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을 동세대 사람인 중년 여성으로 설정한 것도, 더 진정성이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세연은 50세 여성이다. 그 역시도 한쪽 귀는 열려 있고 한쪽 귀는 막혀 있는 양가적인 인물이다. 겉으론 유리천장을 뚫고 한 조직을 이끄는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지만 현실은 그 또한 "살려고 발버둥 치는" 한낱 소모품이기도 하다. 신수원 감독은 세연 역에 반드시 김호정이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연기는 의심할 바도 없고, 한 직장을 이끄는 인물이기에 카리스마 있는 여성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나이스하고 친절한 모습, 부드러움과 강함,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감정 등 여러 가지가 섞여있는 인물이길 바랐고 제가 호정 씨 얼굴을 참 좋아한다"고.
암울하고 생존만으로도 버거운 세상. 세연도 마냥 가해자가 아닌, 악착같이 그 삶을 버티려 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미스터리하게 풀어나가며, 이 사회에 잠복한 불안한 전모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감독이다. 너무 리얼해서 도리어 잔혹하고 씁쓸한 사회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꿈을 포기하면 만날 수 있는 '젊은이의 양지'라는 카피 문구도 너무 가엾지 않나. 하지만 감독은 "희망을 준다는 건 오만인 것 같다. 영화에서 억지스러운 희망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어색하고 정직하지 못하단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다만,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차단하는 인물의 엔딩은 중요했다. 이를 통해 작은 사과와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애쓰지 마요." 극 중 대사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신수원 감독이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콜센터에서 홀로 남아 야근 중인 아이가 채무자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뜬금없이 저 말을 한 뒤 노래를 튼다. 루시드폴의 '난 사람이었네'. "저도 대본을 쓰며 뭉클했다. 저 힘든 아이가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 감정이 어떨까 싶었다"는 감독이다. 노래 또한 마찬가지다. 옛날부터 좋아했다. 10년 전에 처음 듣고 정말 멍해지더라. 그땐 입봉도 못하던 감독 지망생 시절이었다. 나중에 언젠가 이 곡을 영화에 써야겠단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이뤘다. 절더러 "성공한 덕후"라며 웃는다.
실제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질 때, 한 콜센터 직원이 와서 보고는 '내 얘기 같아 많이 울었다'며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 감사하다고 했던 말이 감독은 늘 생각이 난단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생하며 영화를 찍은 것에 대한 대답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영화를 찍는 보람은 바로 여기 있다. "순간순간, 관객들로부터 이렇게 위안을 받는다. 대단한 극찬이 아니어도 '당신 영화를 보며 공감했어요' 하는 순간, 그간의 노력들을 보상받는 느낌이고 이상하게 힐링이 된다"고.
그렇기에 항상 영화를 만들 때 시나리오를 쓰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썼던 신들을, 여러 상황적 변수나 여건 등을 이유로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것이 감독으로서의 고집이다.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힘들고 어렵다. 결과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뭔가를 만들어나가고 해 나가는 행위 자체가 주는 기쁨이 있다. 이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앞으로도 거짓말 없이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단 감독의 바람이다.
사진=리틀빅픽처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