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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죽던 날' 이정은, 무서운 배우의 친근함 [인터뷰]

    배우 이정은의 진면모가 발휘되는 순간은 비단 변화무쌍한 캐릭터 소화력과 스크린 장악력뿐만 아니다. 실제의 유쾌한 성격, 재치 있는 언변으로 가식 없이 털털한 그는 좋은 활력을 가진 이였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속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 그는 코마 상태에 빠진 조카를 돌보며, 마을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않고 살아간다. 무뚝뚝한 표정과 어쩐지 수상쩍은 눈빛의 그가 품고 있는 비밀이 드러날 때, 뜨겁고 뭉클한 희망과 삶의 연대가 피어오른다.  말을 못 하는 캐릭터인 만큼 시나리오에 대사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물의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지문 조차 없었다. 순천댁의 모든 감정과 생각, 표정까지도 배우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정은은 도리어 가장 기본적인 의사 수단인 언어를 제한한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다. "예전엔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신들이 많은 작품을 선호했는데, 캐릭터가 하는 생각과 고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시나리오가 다르게 보이고 진중하게 보여지더라"는 설명이다.  순천댁은 표정으로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이정은은 이를 과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유일한 의사전달은 삐뚤빼뚤 쓰는 글씨체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을 그토록 했다. "왼손으로 쓰면 확실히 필체가 달라진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상과 정갈하지만 투박함이 묻어나는 필체를 쓰고 받침은 어느 부분에서 빼고 넣을지까지 연습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쉽게 스치고 지나갈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사소한 신이라도 이처럼 깊고 중요한 의미를 포착해 집요하게 완성하는 배우 이정은이다. 그는 "말은 의사나 감정을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이지만, 가끔 너무 버거워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한창 떠드는 역할을 할 때", 그래서 마치 "언어가 자신을 짓누를 때"라고 느끼던 순간 배우로서 다른 표현이 뭐가 없을까 고민했다. 그 찰나 운명처럼 순천댁을 만나게 된 것이라고.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대화를 하다가 말이 없는데도 다 이해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스스로에게 질려가던 순간 찾아온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목소리를 잃은 연기를 하니 도리어 주변을 잘 살피게 되고 더 잘 듣게 됐다며, 이를 "다른 감각들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다. 순천댁은 극 중 고립된 채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소녀 세진을 구원하는 유일한 어른이다. 이정은은 언어적 한계를 지닌 순천댁이 도리어 유일한 소통을 하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저도 아직 어른이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의 이야기를 여유 있게 들어줄 수 있는 품위가 있는 것이 어른이 아닐까 싶었다"고.    순천댁은 소녀와 연대하고 삶의 희망을 심어주는 인물이지만, 정작 타인의 시선과 관점으로 본다면 그의 삶 역시 녹록지 않다. 순천댁이 품은 삶의 의미와 희망은 무엇일지, 쉬이 연상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이정은은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고통스럽지만 그가 살아남았던 건 숙명이라고 받아들인 사람이고, 이를 인정한 순간 아이를 만나 그런 마음을 줄 수 있지 않았나 싶다"고 이해했다. 그 역시도 인생을 살며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바 있다. 척추에 병이 생겨 10년 넘게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순간이라도 돌이켜보면 낙담하지 않고 살아온 지금이 좋다고. 특히 이 영화가 인간의 가려져 있는 우울감과 상실, 위기라는 이면을 잘 찾아내 포착한 것이 좋았고 제 역할 또한 그런 고통을 거친 사람이지만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인물이란 것이 좋았단다. 그러면서 "제가 이렇게 사랑을 나눠주는 역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품이 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사실 쪼잔한 사람"이란 너스레를 떨며 웃긴다.  그리고 매번 다채로운 연기 변화를 시도하고, 같은 캐릭터여도 다양한 감상을 전하는 인물들을 연기함에도 "배우가 변해봤자 얼마나 연기 폭이 변하겠나. 자꾸 도전하며 실험해보는 거다. 자기 안에서 많은 것들을 끄집어내고 배열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대수롭지 않다. 이정은은 제법 익살스럽고 긍정의 기운이 넘친다.  인생의 분명한 변곡점이 된 '기생충'의 세계적 성과, 이에 따른 스포트라이트에 대해서도 그리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해외에서 그를 주목하며 작품 제안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블 시리즈에서도 스케줄 문의를 받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팬데믹 현상 때문에 그 탄력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그는 "큰 성과를 내고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배우로서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시점이었다. 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왔을 때 코로나가 터졌다. 어떻게 보면 행운 같은 일을 다 겪고 집에 올 땐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 더 편했고 흥분되는 일이 없으니 더 자중하게 되고 개인적으론 좋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 후광으로 CF를 많이 찍었다. 감독님께 감사하고 동료들에게도 크게 한턱 쏴야 하는데 아직 안 쏴서 괘씸하게 생각할 것 같다"며 익살이다.  최근 법률 드라마를 촬영 중인데 "말 없는 캐릭터보다 교수 캐릭터가 더 어렵다. 지적인 느낌을 내는 게 쉽지 않다"며 혀를 내두르는 그는 친근하고 유쾌하기 이를 데 없다. 선택받는 배우에서 선택 '하는' 배우로 확연히 달라진 위치에도 "제 딴엔 거품이 아닐까 싶다"며 특유의 소탈한 너스레다. 많은 배우들이 아마 그런 순간을 기다릴 테다. 하지만 배우로서 정확한 기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그는 큰 욕심이 없단다. 그저 어떤 작품을 하든 "어떤 진심이 맞닿는 순간을 즐기고 싶은" 것이 소박한 꿈이자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작품을 집중해서 선택하고 싶은 바람을 전하는 이정은이다.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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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굴' 이제훈, 연기 모범생이 찾은 즐거움 [인터뷰]

    이제훈이 제대로 재미를 느꼈다. 눈에 넘치는 생기가 돈다. 순수한 열망과 기대감으로 잔뜩 들뜬 그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즐겁다.  각종 도굴꾼들을 모아 유물을 파헤치며 짜릿한 판을 벌이는 '도굴'(감독 박정배) 속 천재 도굴꾼 강동구. 서울시 강동구에 살아서 이름이 강동구라는 남자. 스님 차림의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불상을 훔치고, 위기감도 없이 대놓고 이를 판다고 고미술상가를 들쑤시고 다닌다. 그리고 높으신 분이 부리는 깡패들이 찾아와 위협을 가해도 속된 말로 '쫄긴' 커녕 대범하고 대담하게 도리어 도발한다. 도굴 팔아 챙긴 돈 2억을 그 자리에서 날리고도 영 아쉬운 기색 없는, 종잡을 수 없고 그래서 더 뻔뻔하고 매력적인 도굴꾼. 이제훈도 스스로 제 연기를 보고 "정말 깐족댄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자신이 상대 역할이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밉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고.  그가 '도굴'에 끌린 건 케이퍼 장르로서 모든 캐릭터들이, 심지어 악역으로 분류되는 인물마저도 다 아껴주고 싶을 만큼 소중하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이야기 구조나 흐름 또한 기승전결이 매끄러웠다. "캐릭터들이 자기가 해야 될 역할이 확실했고, 그 속에 매력이 충분히 잘 보였다. 강동구는 그 중심에서 각 캐릭터를 만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종의 '딜리버리' 같은 인물이었다"는 그는 스토리텔러로서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우선 "즐겁게 봐야 할 오락 영화니까 신나게 노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마음으로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그리고 잔망스럽기까지 한 강동구를 연기하는 건 "재미" 그 자체였다. 강동구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나 리듬은 소소하게 달라지나 기본적인 유쾌한 흐름은 잃지 않는다. 이제훈에겐 그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읽는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오니까, 그걸 연기하는 제 자신도 스스로 궁금해지면서 기대감을 갖고 연기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그러다 보니 재밌고 다양한 표정이 나오는 걸 보며 '진짜 즐기고 있구나'란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실로 강동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측불허' 만큼 적절한 단어가 없을 테다. 진심이 무엇일지, 다음 액션을 어떻게 취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천재 도굴꾼이란 수식어만큼이나 사람을 구슬려 위기를 모면하는 솜씨도 능수능란하다. 특히 죽을 고비에 놓였을 때, 옆 동료를 먼저 죽이라고 다급하게 외치던 것만 봐선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것만 같은데 또 그 동료가 그토록 아끼는 모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 상황에 몸을 날리기도 한다. 그만큼 어디로 튈지 몰라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인물. 이제훈은 "참 촐싹대고 잔망스럽다"고 제 캐릭터를 자평하면서도 이미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치다.  그는 동구가 '어떤 목적으로 도굴을 하는가'를 생각했다. 극 중 동구는 단순하게 유물을 발굴해 비싼 값에 팔아넘기고 돈을 벌겠단 의지를 보이지만, 사실 그의 목적은 애초부터 '진회장'이었다. 자신의 목표를 도달해가는 과정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판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흔들림이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는다. 매우 명확하게 목표 지점을 향해 가는 인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실상은 "지능적인 설계자"임에도 그런 모습이 쉬이 드러나지 않도록 계속 쉼 없이 가볍게 입을 놀린다. 그게 또 그렇게 좋더란다.     강동구의 의중을 파악하긴 쉽지 않지만, 극 중 그의 전사가 밝혀질 때 관객은 비로소 그의 과도한 밝음 깊숙이 숨겨진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엿보게 된다. 그토록 충격적인 트라우마를 겪고도 오히려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놀랍고 딱할 지경이다. 이제훈은 그런 내적 표현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의도했다. 그는 "원래 시나리오에선 과거 이야기가 먼저 시작되는데 영화의 흐름을 빠르게 가져가잔 측면에서 지금의 결과물이 나왔다"고 귀띔했다. 이어서 동구가 진회장을 목표로 삼는 부분에 대해서도 내면적인 표현들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런 신들이 계속해서 노출됐을 때 클리셰처럼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단다. 지금처럼 절제된 에피소드만 보여줘도 관객들은 동구의 '행위의 목적'을 충분히 알 수 있기에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결과물이 더 좋다고.  또한 그런 면에서 연기를 할 때도 신경을 썼다. 일부러 관객을 속이려고 감춰두고 연기하는 인상을 주기보단, "동구가 분명히 뭔가를 안에 숨겨두고 있는데 '진짜야? 가짜야?' 하는 호기심"을 관객도 궁금해하며 지켜볼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너무 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데도 오히려 밝을 수 있는 동구의 마음도 공감했다. 그는 "아프고 힘들면 표정도 안 좋고 힘들어지잖나. 하지만 그럴 때 사람들이 괜찮냐 물으면 오히려 괜찮다고 웃을 때가 있다. 스스로 그런 제 모습들이 동구한테 반영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제 감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위기나 궁지에 몰린 상황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유쾌할 수 있던 동구였기에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며 아낌없는 애정을 퍼붓는 이제훈이다. 하지만 강동구의 능청스러움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분들은 모두 상대 배우들과 액션-리액션이 잘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라고 분명히 공을 돌린다. 그래서 가감 없이 저를 내던질 수 있던 거라고.  그렇기에 이 배우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캐릭터들의 앙상블을 또 보고 싶어 진단다. "이렇게 한 번만 하고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며 조심스레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속편을 기대해보기도 한다. 실제 영화 말미엔 '오구라 컬렉션'이 언급된다.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 전역에서 천 여 점이 넘는 유물을 갈취해간 오구라의 약탈 행위와 더불어 문화재 반환의 중요성을 그토록 유쾌하고 영리하게 담아낸 영화다. 사실 이제훈도 이를 오락 영화로서 재밌게 풀어낸 점이 좋았다. "지금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들이 많다. 빨리 다 돌려받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고, 영화적 재미와 지켜야 될 선을 고심하고 생각하며 작업했다"고.  강동구란 인물을 만나 많은 기운과 에너질 받았단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느낀 바도 컸다. 연기할 때 리듬뿐만 아니라 촬영장에서의 리듬을 만드는 역할도 중요하다는 걸 느낀 덕분이다. 예전엔 연기만 준비하기도 벅찼고, 현장의 흐름을 보면 리드하기보다 수용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먼저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고. 그 변화된 지점이 크게 와 닿은 작품이었다며 소중한 경험의 값어치를 새긴다. "예전엔 작품을 택할 때 제가 연기적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지점을 관객도 함께 얻어가고, 영화의 메시지나 의미를 찾아가셨으면 좋겠단 목표가 강했다. 이젠 그냥 이야기를 따라 관객들도 유쾌하게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제가 이 작품을 하며 매 순간 즐거웠던 만큼, 관객들도 그 즐거운 마음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는 그다. '연기 모범생'이 이제 제법 현장을 제대로 즐길 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 없는지 스스로 계속해서 찾아가고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이제훈의 성실하고 반듯한 성품은 변할리 없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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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굴' 조우진, 타고났다 [인터뷰]

    조우진은 타고났다. 코믹 연기도 출중하다. 탁월한 연기 감이다.    인사동에서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판매하는 남자의 정체는, 알고 보면 신라 고분에 있는 벽화를 감쪽같이 도굴한 전력으로 꾼들의 세계에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고분 벽화 도굴 전문가 존스 박사다. 손 털고 평범한 삶을 살던 그가 갑자기 찾아온 천재 도굴꾼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고, 갑자기 일명 '인디아나 존스' 모자를 쓰는 순간. 그 찰나에 조우진은 이미 그 행위만으로 각종 도굴꾼들이 모여 짜릿한 판을 벌이는 범죄오락물 '도굴'(감독 박정배) 속 존스 박사의 경쾌한 생동감을 담아낸다.  이처럼 강렬하고 확실한 캐릭터의 첫 등장은, 조우진의 애드리브로 만들어진 신이다. "프레임 밖으로 빠졌다가 태세 전환해서 모자를 쓰고 등장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란 생각에서 해본 거라니, 타고났다고 말할 수밖에. 그는 "사실 '인디아나 존스' 하면 모자와 채찍, 허리춤에 총을 찬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 존스 역할을 맡고 나서 감독님께 제일 먼저 의상 중에 모자가 있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극 중 존스 박사의 시그니처인 모자는 "물리적 가치를 따지면 저렴한 거지만, 본인에겐 심장과도 같은 플렉스"란다. 조우진은 사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팬이다. 그토록 애정 하는 존스 박사 캐릭터를 따온 인물이라니, 끌리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대본을 받고 다 읽기까지 "44분"이라는 정확한 수치도 기억할 만큼, "찰지고 재밌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그는 "그동안 제가 남을 괴롭히는 역을 많이 했는데 이제 절 보며 관객들도 편안함을 느끼고 미소를 띠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게 지루함이나 피로감이 드시지 않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만나게 된 '도굴'"이었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다.  다채로운 캐릭터 팀 플레이가 중요한 케이퍼 무비 특성상 캐릭터들 간의 어울림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고유한 매력도 분명해야 한다. 조우진은 그런 의미에서 제 몫을 넘치게 해낸다. 그가 등장하는 신은 큰 액션이나 대사가 없더라도 존재만으로 한 컷, 한 컷,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를테면 첫 도굴 작업을 앞두고 시뮬레이션을 설명하는 신에서 아무도 집중하지 않자 칠판에 분필을 수차례 던지는데 그 분필 깨지는 소리마저도 그토록 웃기고 경쾌할 수가 없다. 조우진은 "어쩌다가 최진기 선생님 강의를 봤는데 분필을 참 잘 던지시더라. 언제 한번 저걸 차용해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존스가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에서 다들 듣는 둥 마는 둥 하길래 요때 써먹어야지 싶었다"고 풀이한다.  허구적인 인물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일은 모든 배우의 몫이긴 하겠다만, 이처럼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포착해 세밀하고 현실적인 묘사로 이끌어내는 것은 비단 조우진의 예리한 관찰력과 영리한 감각 덕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얻어걸린 것뿐"이란 겸손이다. 그 신 이후 열광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금세 뿌듯해져서는 "왜 가수가 은퇴를 반복하는지 알겠다. 바로 팬들의 반응 덕분이지"라며 누가 봐도 과장스럽고 만화 같은 허세 동작을 취하는 그 뻔뻔한 모습마저 사랑스럽던 존스 박사다. 조우진은 "정말 '오글거림 주의' 대사들이 많았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며 새삼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극복도 빨랐다. "존스 박사가 톤이 높다. 오글거리는 대사를 차별화시키면서 진중한 호흡으로 띄어서 얘기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더라"고.    존스 박사는 낭만을 표방하는 인물이지만, 조우진은 그 기저에 깔린 것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그 답은 순수성이었다. 그가 말하길 존스 박사는 첫 도굴 작업 성공 이후, 받은 돈을 모두 레트로 한 빨간 스포츠카를 사는데 쓴다. 자유롭고 낭만이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각박하고 시니컬해진 세상에서 살아나가긴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단지 재밌어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레트로 감성과 이에 대한 혜안을 가진 순수한 인물. 그렇기에 허세와 허풍도 가능한 그런 존스 박사로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그리고 그는 "스필버그 감독도 우리가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는 걸 목표로 했다"고 덧붙였다. 본인도 그런 순수한 낭만을 지녔기에 존스 박사의 순수성과 낭만의 가치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탁월한 감각으로 존스 박사를 탄생시킨 그지만, 사실 사람을 즐겁고 재밌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단 생각을 전한다. "사람의 감정, 희로애락을 건드리고 표현해야 하는 건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워낙 밝고 경쾌한 존스 박사를 연기한 덕분에, 촬영장에서 그의 모습도 조금은 달랐다. 스태프들과 더 장난도 많이 치고, 얘기도 많이 했다. 이는 연기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되고 "서로 격려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좋은 결과물 찍었다는 보람과 성취감"이 느껴졌다.  또한 그는 극 중 등장하는 벽화와 각종 문화재, 미술품 등도 눈여겨봐 달라 당부했다. "유구한 역사와 유물 앞에서 제가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경건함을 느꼈다"며 "비록 영화를 위해 제작된 소품들도 있지만, 영화가 구현한 모든 소품과 공간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목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적 재미를 느낄 것"이라고 자부했다.  조우진은 '기억에 남는 배우'에서 어느덧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노하우가 생기고 노련함도 생길 줄 알았는데, 덜 떨고 있을 뿐이고 살짝 덜 긴장할 뿐이지. 끝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긴장감과 텐션을 늘 갖고 있어야 스스로 자신을 잠그고 채찍질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장면에 임하는 태도, 작품에 임하는 태도를 늘 고쳐 잡아야 한다고. 물론 꾸준히 작품을 하며 관객과 호흡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자 축복"이라며 "제 능력과 상관없이 기대가 높아진 걸 실감한다"는 그는 이에 따른 고민도 늘고 정신없고 부담되긴 마찬가지라 한다. 그러나 "욕먹는 걸 두려워하진 않으려 한다. 두려워하는 순간 배우로서도 인생으로서도 성장이 아니라 노화가 될 수밖에 없단 생각"이다. 그의 목표다. "늘 성장을 꿈꾸자."  "때에 따라선 관객에 위로도 해줄 수 있고, 같이 울어드릴 수도 있는 거다. 영화란 매체를 통해 관객이 현실에서 도피하게끔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조우진이 꿈꾸는 "아티스트"의 정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뭐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연구하는 것이다. "배우란 정말 행복하고 복에 겨운 직업이란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공감을 이끌어낸단 행복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큰 건 인생, 그리고 사람을 배워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로서의 삶도, 제 개인의 삶도 더 풍성해지는 것 같다"며 제가 받은 충족감을 관객에도 돌려주고 싶어 한다. 그런 조우진의 정성이, 그 세밀한 연기에 고스란히 담길 뿐이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