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 김혜수, 한없이 여리디 여린 [인터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 그 작고 소중한 가치를 아는 배우 김혜수가 운명처럼 '내가 죽던 날'을 만났다.
'내가 죽던 날'. 김혜수는 어떤 장르인지, 어떤 이야기인지 모른 채 단지 이 강렬한 제목이 힘 있게 마음으로 푹 와 닿았다. 시나리오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치 "나의 이야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위로가 전해졌다. 운명처럼 이끌린 선택이었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삶의 벼랑 끝에서 소녀를 추적하게 된 형사 현수. 감독은 대중이 생각하는 김혜수의 화려하고 건강한 이미지 이면에 문득문득 보이는 연약함과 슬픔을 엿보고 현수 역할에 자연스레 그를 떠올렸다. 김혜수는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밝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맑은 인생을 살아오기만 하지 않았을 거다. 누구나 다 슬픔이 고통이 있고, 감독님 관점에선 그런 면을 발견했던 것 같다"고 했다.
현수는 그동안 믿어왔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절망에 빠진 상황으로 의문의 자살 사건을 추적하게 된다. 김혜수는 연기적 기술, 삶의 경험, 자신이 느낀 기쁨과 고통들을 자산으로 삼았다. 현수를 드러내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한 것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대상에게 감정적으로 배신을 당했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처참함" 이를 표현하는 김혜수의 압박과 고통에 짓눌린 공허한 표정과 눈빛은 그토록 섬세해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는 현수가 전반적으로 차분한 사람이지만,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됐다고 봤다. "어찌 보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상처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인생이 모두 무너진 것 같은, 온 마음과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자신의 아픔을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려 한다"고. 현실적인 감정 도피를 위해 소녀의 자살 사건을 들여다보니 사건 속에 사람이 보였다. 우연히 맡은 사건을 계기로 자신과 묘하게 연결된 감정의 사슬, 공통의 상황을 느끼며 동일시하게 되고 이에 자신을 돌아보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성장하는 현수. 그런 그를 김혜수 역시 마음으로 공감하고 응원했다. "극 중 순천댁이 '네가 너를 구해야지'라는 말을 하는데 정말 울림이 컸다. 그게 저한테도 필요했던 말인 것 같다. 상처 받고 상처를 안고 살아감에도 누군가에게 손길을 내밀고 위로를 전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희망을 주는 말이었다. 이 영화의 살아있는 주제와도 같았다"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건을 파헤치며 고립된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민하며 끝까지 제 사건에 책임을 지는 현수, 믿음과 희망이 무너진 아이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순천댁. 김혜수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조금 더 많다면,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힘을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고 희망을 걸어본다. 그 또한 돌이켜보면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는 순간이 많았다. 그 역시도 "예기치 못한 고통이나 절망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극복하고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 저도 충격받고 좌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청해지고 울고 그런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제 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위안이었다. "어느 순간 난 너무 힘들고 혼자라고 느꼈는데 지나고 보면 늘 누군가가 곁에서 지켜줬다. 그걸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길 우리 삶이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길다. 순간순간이 신나고 좋기만 하진 않다. 힘들고 지치는 순간도 있지만, 별거 아닌 것에 웃고 힘을 얻으며 삶이 지속된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타인의 삶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이 누군가에게 변화를 줄 수도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곁에 있어준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희망을 갖게 되는 건 대단한 일"이란 그의 생각이다. 그랬기에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이런 시나리오를 만나게 된 게 기뻤고, 이 영화가 제대로 잘 만들어져서 관객들도 그런 위로를 받길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다.
다만 배우로서 글로 쓰인 인물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건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책을 봤을 때 정말 좋았기에 우리가 느끼는 것들이 영상으로 잘 담기고 있는지, 늘 부족한 것 같아 걱정이 많이 됐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안에서 느껴지는 진심들을 그저 우리만 느끼고 끝날까 봐 두려웠다. 이를 전해드리고 싶었고 그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김혜수의 섬세한 감성과 정서적인 공감으로 그려낸 현수는 관객이 극 중 그가 느낀 고통과 절망, 그리고 되찾은 삶의 희망까지 오롯이 이입하고 안도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김혜수는 제 연기가 부족하단다. "과거 연기를 못한다고 대중과 언론한테 혼날 때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그널' 때 김원석 감독님께 정말 많이 배웠다. 왜 우리가 최선이라고 하는 게 나도 모르는 새 최선이란 걸 정해놓은 거라고. 그 정도면 최선을 다 했다고 착각하는 거라고. 그래서 아직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충실하게 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는 대배우의 마음가짐이 이토록 겸허하다.
사실 배우를 하며 정직하게 후회한 적도 있단 그다. 자신이 알지 못한 일에 휘말리고 이슈가 되고 고통을 받는 경우의 순간들을 뜻하는 것일 테다. 그는 "내가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제가 배우를 했기에 얻는 행복도 크지만, 고통스러울 땐 배우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속내를 밝혔다. 언제나 아름답고 강인해 보이지만, 그 내면 깊은 곳은 한 없이 여리고 섬세하다. "전 오래 연기를 했지만 항상 여기까지밖에 안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대 인사할 때 관객들 곁을 지나치거나 할 때 손을 잡아주고 '배우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땐 저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싶으면서도 고맙고 눈물이 날 것 같다"며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의 댓글 한마디 한마디가 또 그날 제 하루의 기분을 다르게 변화시키고, 제 스스로 느꼈던 부족함과 자격지심에도 불구하고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다"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의 마음이 상냥하고 따뜻하다. 배우로서의 책임감은 뚜렷하지만, 자신이 지닌 능력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시선과 여린 감성을 지닌 김혜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소박한 이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