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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사촌' 정우의 진심 [인터뷰]

    배우 정우의 연기는 특별하다. 진심을 눌러 담은 연기로 그 무엇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다. "살아있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연기를 하는 배우"란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이웃사촌'(감독 이환경)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도청팀장이 자택 격리된 정치인 가족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다 진정한 이웃사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빨갱이' 잡는 일이라면 눈을 빛내며 변소에 들어가 오물 범벅이 될지라도 아랑곳 않는 강직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도청팀장 대권 역을 맡은 정우는 거물급 정치인 의식(오달수)을 감시하며 갈수록 인간적으로 동화된다. 결국 자신의 신념을 다시 돌이키며 내리는 용기 있는 선택과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  "굉장히 단숨에 시나리오를 읽었다"는 정우는 처음부터 대권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정치적인 신념과 설정은 단순히 소재일 뿐, 이 인물이 변화하는 진폭을 어떻게 진실성 있게 담아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가 말하길 매 작품마다 초반 캐릭터를 잡을 때 '이 캐릭터가 나라면'이란 가정으로 시작한다. 초반 대권이 변소에서 대사를 칠 때 나라면 저렇게까지 투철하고 강한 느낌의 표현은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권의 상황으로 보면 그게 맞는 거다. 그렇게 "캐릭터의 차이를 찾아가며 점점 나를 변화시키고, 때로 진짜 캐릭터와 나의 마음이 혼연일체 됐을 때 느끼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외골수였던 대권은 차츰 변화한다. 안정된 지위와 보장된 출세 가도를 버리고, 위험천만한 당시 상황 속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가는 인물의 두려움과 용기를 진정성 있는 연기로 선보인 정우다. 그는 대권을 "단순할 것 같으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캐릭터"라고 했다. 그 변화의 이유도 '가족애'를 꼽았다. "저 역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되더라. 대권이 의식을 통해 변화하지만, 그 베이스에는 가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의식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을 때 변화하게 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대권이 의식을 구하기 위해 마포대교에서 필사적으로 해프닝을 일으키는 신은 유독 마음에 들더란다. "시나리오 봤을 땐 정말 파격적이었다. 통닭 봉투 하나 뒤집어쓰고 옷을 다 벗은 채 도로에 뛰어들어 발광하는 모습이 참신하고 새로웠다. 이제껏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지 않나"라며 웃은 그는 이 코믹한 신에 사실 대권의 비장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고 귀띔한다. 이를 두고 마치 "소시민이 슈퍼 히어로로 변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한다.    감정적으로 울컥하는 신도 많았다. 하지만 이환경 감독이 그럴 땐 한 발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연기 디렉션을 주기도 했다. 그게 도움이 됐단 정우다. 감독을 향한 그의 신뢰도는 너무도 당연했다. 17년 전, 이환경 감독은 무명의 정우를 보고 파격적인 주조연 자리에 캐스팅했다. 어찌 보면 지금의 정우를 있게 한 발판을 마련한 감독이다. 그런 감독과 17년 만에 재회한 것은 그에게 더욱 뜻깊고 설레는 일이었다. "같이 작업한 배우들도 힘이 되지만, 이번 촬영장은 특히 감독님께서 제 든든한 동료가 돼준 것 같다"는 그는 "감독님께서 리허설 때 어떤 주문을 하고, 제가 플러스로 다른 아이디어를 내서 연기를 하고, 여기에 또 다른 디렉션,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쌓이며 상승효과가 났다. 매 신이 그랬다. 이게 바로 시너지구나 싶었다"고 했다.  만약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이같은 호흡은 이뤄질 수 없었을 거란다. 그에겐 '이웃사촌'이 특히나 각별했다. 그가 털어놓길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때"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란다. '생활 연기의 달인'이란 수식어가 자연스레 따라붙을 만큼 자유자재로 생동감 넘치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여왔던 그인 만큼 의아함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다. 하지만 그는 "관객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문제와는 다른 것 같다. 제 자신에 대한 질책이다. 이 작품에, 이 장면에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작품에 임했는가, 얼마나 정성을 다 했나 하고 생각하면 부족함이 보일 때가 있었다. 생각처럼 연기가 되지 않을 때 특히나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고 고백했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할 때가 있단다. 자존감이 높아졌다가, 높아지는 걸 넘어서 어떤 때는 교만해지기도 한다고. "연기란 기계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 컨트롤을 잘해야 한다"는 그는 스스로에게 아쉬움이 남는 연기를 할 때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 노력한다. 이 중심점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반복을 하게 된다고.  그럴 때 '이웃사촌'을 만난 것이다. 매일매일 진을 쏟았고, 숙소에 돌아가면 녹초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로 인해 에너지를 많이 받았고 "오늘도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에 안도했다. 감정들을 꺼내 쓰다 고갈되는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는 감독에게 힘을 많이 받았다. "촬영 전엔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굉장한 중압감이 있다. 카메라 앞에서 굉장히 외로운 순간도 있고,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단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는데 이번 현장에선 감독님이 제 친구가 돼 줬다"는 그는 "감독님만의 노하우는 분명 있다. 감독님은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고, 가슴으로 연출하는 사람이다. 가족애가 기본 바탕이고 그 애정과 사랑을 시나리오에 녹이시는 분"이라고 평했다.  정우 역시도 사람에게 에너지를 받고 영감을 얻는다. 그 또한 사람 사는 이야기, 휴머니즘에 끌리는 성향인 탓이다. 스스로에 객관적으로 평가하긴 쉽지 않지만 양심적으로 '너 정말 가슴으로, 진심을 다해 연기했느냐'고 묻는다면 '이웃사촌'은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촬영을 다시 하라면 지금만큼 잘할 자신이 없을 정도"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연기"를 하는 것이 정우의 목표이자 진심이다. "매 작품 진심과 최선을 다해 연기하려 한다. 하지만 뜻대로 표현이 안 돼 문제다. 그걸 다하지 못했을 땐 부끄럽고 아쉽고 속상하다. 얼마나 절실한지가 중요한 것 같다. 오히려 절실함이 사라지면 전 겁이 나더라"고 털어놓는 정우다. 연기에 대한 그의 순수한 갈망, 여기에 담긴 절박함과 간절함이 강렬하다. 그가 바라는 건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다. "정도를 알고, 기본을 지키는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이 진심을 전한다.      사진=리틀빅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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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사촌' 이환경 감독의 선한 영향력 [인터뷰]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며 더 넓은 시각을 갖고 소통하며 교감하는 사람. 이환경 감독의 영화엔 그 특유의 휴머니즘으로 진심을 울리는, 선한 영향력이 가득하다.  '휴먼 코미디의 대가' 이환경 감독이 돌아왔다. 1280만 관객을 웃기고 울린 전작 '7번방의 선물'이 고립된 공간에 갇힌 인물들의 좌충우돌 코믹 라이프와 뭉클한 가족애를 그렸다면, '이웃사촌'은 서로 다른 이유로 집 안에 갇힌 수상한 두 이웃사촌의 뜨거운 우정과 진심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는 과정을 그린다. '7번방의 선물' 이후 어떤 이야기를 그릴지 고민하던 감독은 우연찮게 80년대 가택연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지만 그 시절엔 분명 존재했던 이야기"다. 그러다 중국으로 유학을 가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보름 앞둔 상황, 사드 문제가 발생해 모든 게 중단됐다. 그때 중국 베이징에서 본의 아니게 이도 저도 못하고 직접 격리가 된 상황에서 다시금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시작된 '이웃사촌'이다.  80년대 군부 독재 시절, 암울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데다 영화는 첫 시작부터 '빨갱이'를 잡는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도청 팀장 대권(정우), 미국에서 돌아온 야당 총재 의식(오달수)이 공항에서 납치를 당해 가택 연금을 당하는 장면으로 두 '이웃사촌'의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감독은 "정치적 요소가 분명히 있지만, 정치 얘기를 다루는 정치드라마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그렇기에 "군부독재 시절에 실제 있었던 일들을 어떻게 희화화시키며,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가 늘 가져가는 '톤 앤 매너' 이를테면 가족, 휴먼, 코미디를 그 시대에 대입했다. "저는 아무리 보기 힘든 스릴러물이나 전쟁물도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의 부분이 가장 먼저 보인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장기로 상황들을 짚어보는 게 있다"고 웃어 보인 감독이다.  그렇기에 야당 총재라도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한 가장의 평범한 아빠인 편안하고 서민적인 모습을 부각했다. 제 아버지 존함 이의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그래서였다. 감독은 "제가 아버지를 떠올릴 때 느낀 따뜻함, 서민적인 느낌을 야당 총재에 대입하면 어떨까 싶어서 아버지 성함을 사용하게 됐다"며 "부모님 성함을 그대로 사용했다. 극 중 사용한 명패를 영화 끝난 뒤 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더니 문 앞에 직접 걸어두셨다"고 에피소드를 전한다. 이 작은 에피소드에도 따스한 애정이 묻어난다.  이환경이 중요하게 생각한 키워드는 '소통'과 '교감'이었다. '빨갱이'를 잡아야 한다며 단선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대권이, 의식을 도청하고 지켜보며 기본적인 그의 삶의 방식을 엿보게 된다. 의식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배앓이를 하면서도 농가를 위해 우유를 먹고, 가족들과 라디오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아들과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어주고 싶은 평범한 가장. 이런 기본적인 삶의 방식을 잊고 살던 대권은 점차 의식에 대해 마음이 열린다. 감독은 이를 두고 "커다란 히어로처럼 엄청난 일을 경험하며 바뀌는 인물보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감정이 가는 것을 염두했다. 남녀도 사랑할 때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사랑에 빠지지 않나. 대권이 의식에게 마음을 여는 부분, 의식이 그런 대권을 아끼는 마음에서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밀어내는 부분 등은 어떻게 보면 남녀 간의 사랑처럼 대입해 '브로맨스'로 그려낸 부분이 있다"고 귀띔했다.  도청 과정을 통해 전달하는 코미디와 서스펜스의 결을 배합시키는 것도 중요한 몫이었다. 감독은 "코믹적이면서도 서스펜스를 줘야 하기에 얼굴 표정이나 작은 숨소리, 자그마한 대사 디테일 등의 차이를 디렉션 하나로 연기한 오달수, 정우 배우에 대해 '어마무시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감탄했다. 특히 17년 전 무명의 정우를 발탁한 감독인 만큼 이번의 재회는 남달랐을 테다. 감독은 "예전에 정우를 봤을 땐 '라이온킹'의 어린 심바 같았다. 세상에 거리낄 것 없는 천방지축 같은 친구였다. 그렇게 마음속에 들어온 친구였다. 이번에 다시 만난 그는 저돌적이고 열광적이고 열정적인 친구가 그 느낌은 고스란히 갖고 있지만, 이를 누를 수 있는 겸손에 대한 용기가 더 엄청나게 커졌구나 싶었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이다.  오달수에 대한 감독의 신뢰도는 두말할 것 없다. 그는 특히 오달수와 박철민이 함께 붙는 신을 설명하며 "오래된 정치적 동지라는 무게감이 있지만, 함께 있을 땐 진짜 어린 시절 친구 보듯 천진난만한 아이들 같았다. 그러다 정극 연기에서는 무게감과 울림이 엄청났다"며 혀를 내둘렀다. 오히려 공간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담벼락을 하나 두고 옥상까지 붙어 있는 집을 찾으려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그러다 군산에서 발견한 집을 재보수했다. 당시 유행했던 타일을 고수해서 꼼꼼히 디테일을 살렸단 설명이다.    제 기분에 따라, 혹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평범한 노래도 검열하는 군부 독재의 모습은 꽤 '웃프다'. 코믹하고 정겨운 이웃들의 모습이 마냥 훈훈하고 사랑스럽다가도, 최악의 시대적 상황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대권이 변화하고,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의식을 위해 용기를 내는 모습은 영화의 뜨거운 변곡점이 된다. 감독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기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판타지를 불어넣는 거다. 제 영화에선 늘 이런 판타지가 들어간다"고 했다. 특히 대권이 변화하는 신을 찍을 땐 정우도 울고 저도 울고 곽티슈 한 통을 다 썼더랬다. 이후 대권이 의식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발악하는 몸부림이 마치 판타지와도 같았다는 설명이다. "제가 마음으로 쓰지 않으면 다 거짓으로 느껴진다. 어떤 분들은 유치하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저는 스스로 곱씹고 곱씹으며 대사를 만든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는다"고.  가족과 사랑, 소통과 교감. 감독이 늘 추구하는 키워드다. 이런 키워드를 통해 좀 더 밀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많은 관객들에 행복감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 감독의 바람이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주신 사랑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나를 위해 저렇게 해주시는구나 교감을 했고 이게 소통으로 이어진 것"이라며 그 역시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사람,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고 싶단다. "제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끊임없이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감독의 바람은 따뜻하고 선한 온기를 지니고 있다.  사진=리틀빅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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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죽던 날' 김혜수, 한없이 여리디 여린 [인터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 그 작고 소중한 가치를 아는 배우 김혜수가 운명처럼 '내가 죽던 날'을 만났다.    '내가 죽던 날'. 김혜수는 어떤 장르인지, 어떤 이야기인지 모른 채 단지 이 강렬한 제목이 힘 있게 마음으로 푹 와 닿았다. 시나리오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치 "나의 이야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위로가 전해졌다. 운명처럼 이끌린 선택이었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삶의 벼랑 끝에서 소녀를 추적하게 된 형사 현수. 감독은 대중이 생각하는 김혜수의 화려하고 건강한 이미지 이면에 문득문득 보이는 연약함과 슬픔을 엿보고 현수 역할에 자연스레 그를 떠올렸다. 김혜수는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밝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맑은 인생을 살아오기만 하지 않았을 거다. 누구나 다 슬픔이 고통이 있고, 감독님 관점에선 그런 면을 발견했던 것 같다"고 했다.  현수는 그동안 믿어왔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절망에 빠진 상황으로 의문의 자살 사건을 추적하게 된다. 김혜수는 연기적 기술, 삶의 경험, 자신이 느낀 기쁨과 고통들을 자산으로 삼았다. 현수를 드러내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한 것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대상에게 감정적으로 배신을 당했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처참함" 이를 표현하는 김혜수의 압박과 고통에 짓눌린 공허한 표정과 눈빛은 그토록 섬세해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는 현수가 전반적으로 차분한 사람이지만,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됐다고 봤다. "어찌 보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상처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인생이 모두 무너진 것 같은, 온 마음과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자신의 아픔을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려 한다"고. 현실적인 감정 도피를 위해 소녀의 자살 사건을 들여다보니 사건 속에 사람이 보였다. 우연히 맡은 사건을 계기로 자신과 묘하게 연결된 감정의 사슬, 공통의 상황을 느끼며 동일시하게 되고 이에 자신을 돌아보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성장하는 현수. 그런 그를 김혜수 역시 마음으로 공감하고 응원했다. "극 중 순천댁이 '네가 너를 구해야지'라는 말을 하는데 정말 울림이 컸다. 그게 저한테도 필요했던 말인 것 같다. 상처 받고 상처를 안고 살아감에도 누군가에게 손길을 내밀고 위로를 전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희망을 주는 말이었다. 이 영화의 살아있는 주제와도 같았다"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건을 파헤치며 고립된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민하며 끝까지 제 사건에 책임을 지는 현수, 믿음과 희망이 무너진 아이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순천댁. 김혜수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조금 더 많다면,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힘을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고 희망을 걸어본다. 그 또한 돌이켜보면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는 순간이 많았다. 그 역시도 "예기치 못한 고통이나 절망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극복하고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 저도 충격받고 좌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청해지고 울고 그런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제 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위안이었다. "어느 순간 난 너무 힘들고 혼자라고 느꼈는데 지나고 보면 늘 누군가가 곁에서 지켜줬다. 그걸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길 우리 삶이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길다. 순간순간이 신나고 좋기만 하진 않다. 힘들고 지치는 순간도 있지만, 별거 아닌 것에 웃고 힘을 얻으며 삶이 지속된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타인의 삶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이 누군가에게 변화를 줄 수도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곁에 있어준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희망을 갖게 되는 건 대단한 일"이란 그의 생각이다. 그랬기에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이런 시나리오를 만나게 된 게 기뻤고, 이 영화가 제대로 잘 만들어져서 관객들도 그런 위로를 받길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다.  다만 배우로서 글로 쓰인 인물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건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책을 봤을 때 정말 좋았기에 우리가 느끼는 것들이 영상으로 잘 담기고 있는지, 늘 부족한 것 같아 걱정이 많이 됐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안에서 느껴지는 진심들을 그저 우리만 느끼고 끝날까 봐 두려웠다. 이를 전해드리고 싶었고 그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고.  김혜수의 섬세한 감성과 정서적인 공감으로 그려낸 현수는 관객이 극 중 그가 느낀 고통과 절망, 그리고 되찾은 삶의 희망까지 오롯이 이입하고 안도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김혜수는 제 연기가 부족하단다. "과거 연기를 못한다고 대중과 언론한테 혼날 때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그널' 때 김원석 감독님께 정말 많이 배웠다. 왜 우리가 최선이라고 하는 게 나도 모르는 새 최선이란 걸 정해놓은 거라고. 그 정도면 최선을 다 했다고 착각하는 거라고. 그래서 아직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충실하게 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는 대배우의 마음가짐이 이토록 겸허하다.  사실 배우를 하며 정직하게 후회한 적도 있단 그다. 자신이 알지 못한 일에 휘말리고 이슈가 되고 고통을 받는 경우의 순간들을 뜻하는 것일 테다. 그는 "내가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제가 배우를 했기에 얻는 행복도 크지만, 고통스러울 땐 배우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속내를 밝혔다. 언제나 아름답고 강인해 보이지만, 그 내면 깊은 곳은 한 없이 여리고 섬세하다. "전 오래 연기를 했지만 항상 여기까지밖에 안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대 인사할 때 관객들 곁을 지나치거나 할 때 손을 잡아주고 '배우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땐 저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싶으면서도 고맙고 눈물이 날 것 같다"며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의 댓글 한마디 한마디가 또 그날 제 하루의 기분을 다르게 변화시키고, 제 스스로 느꼈던 부족함과 자격지심에도 불구하고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다"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의 마음이 상냥하고 따뜻하다. 배우로서의 책임감은 뚜렷하지만, 자신이 지닌 능력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시선과 여린 감성을 지닌 김혜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소박한 이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