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설경구, 정약전이 살아 숨 쉬듯 [인터뷰]
진실됨은 배우 설경구를 뜻하는 가치다. 그의 연기는 얕은수를 쓰지 않는단 믿음과 신뢰를 준다. 그렇기에 첫 사극이자 흑백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이 돼 행한 그의 모든 순간과 표정은 고귀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을 설명하는 단면이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는 역사적, 학문적인 접근이 아닌 정약전이라는 인물의 내면과 깊이를 헤아렸다. 누구나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이 지식이 곧 권력인,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던 이, 그랬기에 배척당한 지식인. 강렬한 신념과 이상, 깊은 비애와 두려움까지 흑백의 선명함으로 담아낸 설경구의 모습은 뚜렷하고 짙은 여운을 전했다.
성범죄자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절망에 빠진 가족이 이웃들의 따뜻한 연대로 희망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 '소원' 이후 이준익 감독과 다시 만난 설경구다. 그에게 감독은 친구 같기도, 형 같기도, 아버지 같기도 한 각별한 사람이라고. 우연히 감독을 만나 대뜸 "대본 주세요"라고 했을 때 이준익 감독은 사극을 쓰고 있다고 했단다. 여태껏 사극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준익 감독이기에 기꺼이 택했다. 설경구는 ‘자산어보’에 깊이 빠져들수록 먹먹했다. "처음엔 감정이 확 오지 않았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젖어 들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 특히 약전과 약용이 유배길에 올라 헤어지는 장면에서 서로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모습에 뭉클해지고, 세상 밖으로 나간 창대가 다시 흑산으로 돌아오려 갓을 벗는 모습에선 눈물이 났단다. 두려웠던 흑산이, 자산이 되었다는 문구에서도 그의 표현대로 "젖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산어보'가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오른 정약전이 흑산도 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들, 일상의 이야기, 그리고 비극이 아닌 희망이 있는 영화라 여겼다. 그랬기에 더 좋았다. 사극 톤에 대한 어색함과 걱정은 있었지만, 처음 촬영장에서 의상을 입고 등장했을 때 이준익 감독이 "우리 할아버지와 똑같다"는 말을 해서 자신감이 생기더란다. "감독님은 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점은 묻어두고 장점을 말씀하신다. 제가 어차피 약전을 하는 상황이니 자신감과 용기를 주려고 하신 말씀 같기도 하다"며 너스레지만 "연기는 자신감인데 제게 큰 힘을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는 설경구다.
간접적으로 정약전이란 실존 학자의 삶을 체험하며 그는 많은 감상에 젖었다. 특히 그는 약전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내면의 아픔이 엿보였다. "정약전은 그 시대엔 정말 위험한 인물이었을 거다. 양반도 상놈도 계급이 없고 더 나아가 임금까지도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 답답함이 있을 것 같았다." 설경구가 말하길 그 시대는 이런 이상을 품은 약전을 포용할 수 없는 사회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달리 군주와 관리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이롭게 한단 '목민심서'를 쓴 동생 정약용의 이상을 인정하며 동생의 영원한 멘토로 도움을 줬다. 스스로의 신념을 고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확고한 사상을 가진 꼿꼿한 이였지만 '다름'을 배척하기보다 이또한 포용할 수 있는 이였다. 하지만 '자산어보'에서도 저술했듯 '흑산이 두려워 자산이라 했다'는 그의 말에서 인간 내면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봤다. 설경구는 그런 약전이란 인물에 연민이 들었다.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시대엔 '자산어보'와 같은 저서를 쓰는 사람이 흔치 않고 관심도 없었을 것 같다. 그 시대엔 왕만 바라보고 관료가 되는 것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런 관료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백성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걸 보며 어쩌면 정약전이 피를 토하며 '자산어보'를 썼을 수도 있겠더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이렇게 배척당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니었겠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짠했다. 인간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 명징한 사물에 대해 관찰하기로 했다는 극 중 그의 대사가 더 깊이 와 닿은 까닭이다. 그는 "해양 생물엔 일자무식인 사람이 섬사람에 물어가며 하나하나 기록을 해놓은 것이 '자산어보'다. 가장 백성들에게 실용적인 책을 만든 거다. 이 가치는 더욱 올라가야 하지 않나"라고 견해를 전했다.
하지만 설경구는 '배척당한 지식인'으로서의 약전의 외로움을 전면에 담기보다 그런 상황에서도 흑산도의 따뜻하고 정겨운 민초들을 만나 새로운 희망을 보는 약전의 모습을 담으려 했다. 그랬기에 때론 개구지고, 해양 생물을 바라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도 고스란히 설경구의 모습에 담겼다. 그는 "그건 진짜 연기가 아니었다. 저도 처음 보는 생물들이라 신기했다"며 눈을 빛낸다. 특히 짱뚱어의 볼이 볼록하게 올라와야 하는 신을 찍을 때 언제 볼을 불릴지 몰라 기다리기도 하고, 바로 눈 앞에서 그 모습을 보니 귀엽고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단다.
우정 출연이 워낙 많아서 섬에 촬영하러 온 배우들을 위해 환영회와 송별회를 열어주는 경험도 재밌었다고. 세 번의 태풍을 겪기도 했는데 절벽 위 세트가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며 집을 나무에 줄로 매달아 놓는 등 난리를 겪기도 했단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고 나서는 선물처럼 모든 게 깨끗해지고, 파도도 입체적이 됐다. 하늘은 맑고 별은 빛났다. 태풍이 준 피해도 있었지만, 태풍이 준 그림도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했다"며 제법 운치 있는 회상이다.
정약전이 낯선 공간인 흑산도에서 느꼈을 두려움과 고독함부터, 점차 흑산도 사람들과 동화돼 섬 생활에 적응해나가며 새로운 호기심을 갖는 모습에 이어 창대를 향한 믿음과 애정, 걱정과 염려까지. 설경구는 약전의 다채로운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야말로 약전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정약전의 가치관과 그의 삶을 이해하고 고민하며 연기에 진정성을 담은 탓일 테다. 그럼에도 설경구는 "제가 약전처럼 그렇게 큰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며 손사래다.
아끼는 영화인 만큼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지만 팬데믹 상황에 개봉하게 돼 마음이 편치 많은 않단 설경구다. 그래도 "모두 이를 극복해서 깊은 협곡이 되고 하면 높은 봉우리에 언젠가 오를 때도 있을 것"이라며 운치 있는 말을 남긴다. 무엇보다 '지천명 아이돌'이란 수식어답게 "팬분들은 늘 제게 흥도 주시고 긴장도 주신다. 늘 감사하다. 제 편을 들어주시고, 우린 같은 편이란 생각이 들게 해 줘서“라며 쑥스럽게 마음을 전하다. ”더 좋은 작품, 좋은 모습으로, 좋은 사람으로 인사를 자주 드리고 싶다. 요즘 같은 시기라 못 뵌지도 꽤 됐는데 많이 보고 싶다"며 수줍은 진심을 건넨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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