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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일의 밤' 김태형 감독의 확고한 세계관 [인터뷰]

    인간과 깨달음에 대한 깊은 고찰을 통해 강렬한 주제의식을 구축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것. 데뷔작 '제8일의 밤'으로 새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한 김태형 감독은 여러모로 알고 싶어지는 인물이다.  2500년 전,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지옥문을 열려고 했던 요괴는 붉은 눈과 검은 눈으로 나뉘어 부처에 의해 사리함에 갇혔다. 다시 '깨어나서는 안 될 것'을 지키기 위한 '지키는 자'의 사투를 그린 영화 '제8일의 밤'.  이 이야기의 시작은 김태형 감독의 특이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어느날 자려고 벽을 보고 누웠는데 감은 눈앞에 등 뒤의 방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착각을 했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머리 뒤에 눈이 떠져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적어둔 '뒤통수,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있는 검은 눈알'이라는 짧은 메모는 6년의 방대한 자료조사 끝에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오컬트 스릴러 '제8일의 밤'으로 다시 태어났다.  불교의 금강경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색채가 짙은 오컬트 스릴러 영화는 생소하고 흥미롭다. 김태형 감독은 "마침 불교적인 철학을 많이 생각하던 찰나"였다며 6년 전 시나리오 구성 당시를 회상했다. 대표적인 불교 경전인 금강경은 붓다와 제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돼 있으며, 석가모니가 대중에게 설법하는 장면도 담겨 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던 감독의 머릿속에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 어느 순간 요괴가 와서 속닥거리며 방해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모로 창의력과 상상력이 남다른 김태형 감독이다. 감독은 그렇게 떠올린 요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 '깨어나서는 안 될 것'의 존재를 만들었다.  이어 초고를 만들고 무려 6년의 각색 과정을 거쳤다. 감독은 "처음엔 호흡이 긴 이야기였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압축하는 과정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 털어놨다. 실제 영화는 등장인물의 전사와 관계성 등이 암시하는 의미가 크지만 생략된 듯한 장면이 곳곳에 있다. 감독도 이를 아쉬워하며 "만약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인물들을 좀 더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을 거다. 표면적으로 보면 삭제되고 줄인 부분이 많이 있다"고 털어놨다.  이를테면 청석의 목에 걸린 묵언 수언 목걸이는 실은 진수의 것으로 과거 '지키는 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칠때 했던 수행이라는 설정 등이다. 이밖에도 감독이 전한 흥미로운 설정들이 꽤 많다. 드라마처럼 긴 호흡으로 스토리를 끌어갔다면 좋았을 법도 했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를 목표로 연출부 일을 하면서 꿈을 키워왔던 만큼 영화에 대한 애착이 컸음을 인정했다.  장르적인 설정을 부각하기보다 메시지에 치중된 스토리 또한 감독이 고심하던 부분이었다. 감독은 "처음 구상을 할 때부터 공포 안에 드라마가 있지 않고, 드라마 안에 공포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메시지 전달에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며 "메시지 중심을 잡다 보니 시나리오 과정에서 배제된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했다. 다만 이번 작품에서 오컬트 스릴러 장르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을 관객들을 위해 다시 한번 시도해서 균형을 맞춰 더 확실한 재미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편협한 생각을 갖기보다 어떤 평가나 결과도 진지하고 겸허하게 수용하는 감독의 자세가 바람직하다. 이에 김태형 감독은 "영화를 공부하며 상업영화가 가져야 할 덕목 두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믿고 자본을 투자해준 분들에 손해를 입히면 안 되고, 나아가 이익을 드려야 된다는 것. 또다른 하는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진지하게 설파했다. 메시지 전달이나 명확한 주제 의식은 감독으로서 고집을 갖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상업영화감독으로서 이 두 가지 덕목을 바탕으로 새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관객을 즐겁게 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 호불호가 갈린 것 같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더 오컬트 장르로 확실한 재미를 드려야 하지 않나 싶다"는 감독에게서 책임감과 솔직한 진정성이 엿보인다.  비록 자신이 구축한 방대한 세계관이 영화에 다 담길 수 없어 아쉬움을 자아냈을진 몰라도, 김태형 감독은 오래 준비한 데뷔작을 통해 확실한 주제 의식은 물론 이를 담아내는 대담하고 흥미로운 창의력과 탄탄한 깊이를 엿보게 했다.  특히 '깨어나선 안 될 것'의 정체가 사실은 신도 타인도 아닌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라는 설정은 허를 찌르는 비유법이다. 탐욕·분노·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대한 속박, 무한한 번뇌와 번민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몫이다. 무수히 많은 고통과 좌절, 희망과 기쁨을 맛보며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인생의 진리와 깨달음이 담긴  묵직한 메시지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데뷔작에 이처럼 명확하고 깊이있는 메시지를 담는 감독은 드물다.  이에 감독은 "개인적으로 종교는 사람을 위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해, 여러 종교들이 하나로 뭉친단 이념을 갖고 있다. 불교적인 색채라고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며 공부하고 준비했던 과정은 서양 철학 쪽에 가까웠다"고 했다. 그중 '인간이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불교적인 철학에서 봤을 땐 인생은 다 찰나이고 이 과정에서 허무함과 허망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나가는 것인가를 핵심 포인트로 삼았다. "사람 내면을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웠다. 과거에 대해 후회하며 분노하고, 미래가 어떨지 불안하며 두려워한다.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에 감사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가는 결국 개인적인 선택 지점"이라며 "그런 내러티브가 있는 극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확고한 세계관의 본질을 전했다.  더불어 감독은 "이야기 속에도 형이상학 적인 것을 형이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미움, 이런 형이상항 적인 것을 눈에 보이게끔 표현하고 싶고 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나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제8일의 밤' 속 인간이 스스로의 결연한 의지를 갖고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웅장하고 경이로운 서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깊은 주제의식까지 관통하는 이야기를 연출하고 이미지화하는 감독의 탁월한 재주는,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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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일의 밤' 이성민, 인생의 깨달음 [인터뷰]

    배우 이성민은 사뭇 진지했다. 그의 언행에는 삶에 대한 고찰에서 얻어낸 혜안이 담겨있다. 무수히 많은 질문과 사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제8일의 밤'(감독 김태형)은 봉인에서 풀려난 '깨어나서는 안 될 것'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지키는 자'가 8일간의 사투를 벌이는 오컬트 스릴러 장르 영화다.  이성민은 지키는 자의 운명을 타고난 진수 역을 맡았다. 선화라 불리는 스님이지만 과거의 업보와 고통의 굴레 속에 빠져 속세로 나온 인물. 한 손엔 염주를 묶고, 다른 손엔 도끼를 든 스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판타지다. 공포나 호러 장르는 무서워서 보지도 못했단 이성민도 이같은 설정이 퍽 맘에 든 모양이었다. 이전부터 캐릭터 영화를 해보고 싶었단 그가 진수 역을 처음 접하고 마치 '콘스탄틴'을 떠올렸을 정도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콘스탄틴'은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타고난 인물이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면서도 운명에 벗어나기 위해 악과 싸우는 일을 그린 영화다.  이성민이 '제8일의 밤'을 택한 것은 이런 생소하고 비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흥미도 있지만, 그보다 영화의 주제에 이끌린 탓이 컸다.  우연히 보게 된 양자역학 영상을 통해 원자의 원리 등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됐고 이는 무수히 많은 질문을 낳았다. "우주가 얼마나 큰지, 우주의 별 만큼이나 많은 것이 원자로 이뤄졌고 그렇다면 우리가 본다는 것이 대체 뭘까. 모든 것이 원자로 돼 있다면 빛이나 시간은 무얼까.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일까. 만약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접하게 된 '제8일의 밤'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 세상을 파괴하고, 이를 '지키는 자'의 사투. 여기에 번민과 번뇌, 과거의 업에 대한 속박. 그 뜨거운 불기를 끄고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는 열반과 해탈. 정신적인 깨달음이 초월적인 이성에 의존한다는, 불교의 '금강경'을 바탕으로 전하는 영화의 명확한 주제는 철학적 사유에 빠진 이성민을 매료시킨 게 자명했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있던 부분과 맞닿은 지점"에 기꺼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다. "감독님의 시나리오에서 펼쳐진 세계관, 감독님의 시선과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고. 이성민은 "오컬트 영화라고 규정됐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드라마에 더 가까운 이야기"라며 장르를 빌려서 생의 깨달음과 진리를 설파하는 영화의 주제를 '제8일의 밤'만의 특색이라고 꼽았다.    진수는 영화의 주제인 '번뇌'와 '번민'을 오롯이 담고 있는 인물이다. 이성민은 "진수의 모습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랬기에 캐릭터의 외적인 모습보다 내면의 정서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진수는 과거의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 저를 가둔 무한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살아간다. 그 속에서 반복되는 고통과 분노, 증오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며 의욕 없는 삶을 연명하고 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이 모든 속박을 끊어내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 지점은 강렬한 절정을 이룬다.  이성민은 "다들 번뇌가 있고 고민 속에 살고 있다. 그게 없다면 다 부처가 아니겠나. 저도 헤쳐 나아가고 털어내야 할 감정이 끊임없이 생긴다. 그러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주변도 다스리며 관계도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게 해야겠단 생각을 한다"고 했다.  특히 영화에 인용된 '생은 잠시 피어난 풀 싹 같은 것, 꿈이며 환상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 참으로 허무한 것. 허나 정해진 운명 속의 허무한 잠시일지라도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이라는 문구에 심취한 그다. '나는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한 끝없는 갈구를 어렴풋이 찾아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이 이 영화를 찍으며 구체적으로 명확해지는 느낌"이라는 이성민이다. 그가 말하길 자신의 현재 삶은 모래시계로 따지면 모래의 반 이상은 떨어졌다. 살아온 시간이 앞으로 살 시간보다 많을 거다. 생이란 무엇일까를 문득 그리도 고뇌했다. 그 끝에 깨달음이 있었다. 좀 더 넓게 보면 인간의 삶이란 별거 없다. 이 넓은 우주에 대면 보잘것없는 먼지 같다. 그렇게 찰나일 뿐인데 굳이 고통스럽게 살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게 앞으로 살고 싶은 내 인생의 모습 아닐까." 삶에 대한 상념 끝에 깨달음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이 초연할 따름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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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낭만의 아웃사이더 [인터뷰]

    '사건'이 아닌 '사람'을 먼저 보는 시선은 따스한 연민과 깊은 이해로 가득하다. 그 시선으로 담은 이야기는 특별한 온기와 생동감을 갖는다. 조선의 한 학자가 남긴 수산학 서적 '자산어보' 속 한 구절은 이준익 감독의 그 시선과 맞닿아 펄떡이는 생명력을 갖고 살아 숨 쉬며 강렬한 여운과 울림을 주는 이야기로 탄생했다.  이준익 감독이 열네 번째 영화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신유박해로 유배지에 오른 학자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해양 생물을 접하고 이를 세세하게 기록한 '자산어보'의 실제 서두에는 창대라는 섬사람이 등장한다. 두문사객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해 서적이 많지 않은 탓에 식견이 넓지 못한 이지만,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해 해양 생물을 접하는 대로 세찰하고 침사해 그 성리를 터득하고 있는 이.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며 완성한 책이 '자산어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가 남긴 어류 서적 속 정약전의 면모와 그를 도운 창대와의 관계를 발견하고 방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준익 감독에게서 특유의 관찰력과 타고난 '이야기꾼' 면모를 엿보게 한다. 감독은 이미 정약전의 세계관은 '자산어보' 서두에 창대의 이름을 기명한 것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났다고 봤다. "신분을 떠나 수평 사회를 지향하는 그의 사회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파고드는 것 또한 감독답다. '동주'의 송몽규가 그랬듯 '박열' 속 박열과 후미코가 그랬듯. 이준익 감독은 "원래 내가 아싸 출신이라 그래"라며 한결같은 너스레다. 모든 집단의 8대 2 법칙을 생각하면 '인싸'는 소수다. 다수가 '아싸'이니 '아싸'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라고 너털웃음이다. 하지만 소위 '비주류'를 향한 감독의 애정은 늘 각별했다.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획일적인 시선을 거부하고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감독의 가치관 때문일 터. 그런 감독이기에 정약전에 매료됐을 게 자명했다.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은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실학서로 유명한 '목민심서'를 쓴 이다. '목민심서'는 어진 임금과 관료가 백성을 다스리면 나라가 번창한다고 믿는, 감독 표현에 의하면 "왕을 전제로 왕 밑에 신하로 들어가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리게 하는 공무원 행동 지침"이라면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실질적으로 백성들이 학문할 수 있는 요즘 말로 '백과 사전'이었다. "그 가치는 어떻게 구분되어지는가를 따라가다보니 '자산어보' 안에는 생활이 있고 '목민심서' 안엔 사회의 한 단면과 부조리가 있더라"는 감독이다.  이준익 감독이 말하길 집단이 유지되려면 수직사회의 형성은 필요하다. 수직사회는 집단을 지탱하는 중심이 되기에 '목민심서'도 소중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집단주의적 사상을 강요했을 땐 집단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이 발생한다. 개인의 희생을 최소화하며 개인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것이 수평 사회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시대 현실에 맞는 역사 관점으로 보면 정약전의 세계관과 그 가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두 책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구성하게 됐다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차이다. 그 차이가 서로에게 배타적인 사회적 갈등으로 커질 때가 있는데 그 갈등을 줄이고 서로를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감독이다.  극 중 정약전, 약용 형제는 각각 유배지에서도 서로의 안위를 묻고 생각을 주고받는다. 사상은 달랐음에도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한시를 통해 우아하고 운치 있게, 때론 애절하게 담긴다. 감독은 이를 두고 "서로 반대되는 이들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깊은 이해를 하는 것. 그게 조화"라고 얘기했다.     무엇보다 사극에서 일상성이 보이는 영화를 찍고 싶은 감독의 바람은 "먹고 채집하고 호기심을 갖고, 일상에서 만들어진 책"인 '자산어보'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했다. "일상은 유쾌한 거다. 이 영화는 일상이 주가 됐다. 조선 시대의 일상의 기지라는 것이 유쾌하고 활동적인 것으로 그려지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는 감독이다.  흑백으로 담긴 흑산도의 절경 또한 먹으로 빚은 수묵화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때론 선명하고 펄떡이며 요동치는 격정을 담기도 한다. 이에 감독은 "'동주' 때의 흑백은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동주란 인물은 순수의 상징이었고 이에 어긋나게 인물을 담으면 그 자체로 훼손하는 느낌이라 너무 조심해서 함부로 찍을 수 없는 조심스러운 흑백이었다면, '자산어보'는 좀 더 역동적으로 찍었다. 그러면서도 흑산도란 자연 환경이 미학적으로 담기는 흑백 촬영을 시도했다. '동주'는 방어적이었다면 '자산어보'는 공격적인 흑백"이라고 설명했다.  정약전의 유쾌한 면모를 담아냈지만, 사실 그는 시대란 비극에 맞물려 배척된 지식인으로서의 비애가 있다. '자산어보' 서두에 적힌 "흑산이 두려웠다"는 그의 고백은, 강한 이상과 신념을 지닌 지식인 이면에 인간의 외로운 내면을 엿보게 하며 연민을 품게 했다. 하지만 감독은 "배척당한 사람이 남은 생에 무엇을 위해 사느냐, 이에 따라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애수가 아닌 의지를 봤다. 약전은 다른 세상을 꿈꿨다. 왕도 없고 계급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 감독은 이를 사상적 근대성으로 봤다. "'자산어보'의 성질이 그렇다. 성리학에선 그게 무슨 가치가 있겠나 싶지만 정약전은 체제적인 근대까지 생각한 것"이라고.  물론 인간적인 연민으로 보자면 세상 끝에 유배 온 정약전의 마음은 삶에 대한 의지가 많이 꺾였을 것이었다. "처음 흑산도를 갈 때 태풍 온 다음날 가서 정말 무서움을 넘어 지옥이라 생각했다. 1800년대에 목선을 타고 흑산도로 가는 정약전의 심정은 어땠을까 싶더라"고. 하지만 유배지에 온 조선 학자를 품어준 가거댁과 흑산도 사람들이 없었다면 정약전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관리들의 수탈에 극도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지는 비극의 클라이맥스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을 준다. 실제 정약용의 시 '애절양'과 맞물려 드러나는 개인과 시대의 비극은 더없이 강렬하다. 감독은 "애절양은 정약용이 직접 그 시대에 목도한 걸 쓴 거다. 그 시대의 선명한 단면을 그려주지 않으면 이 영화는 껍데기라 생각했다. 이 영화에 알맹이를 담기 위해 넣은 신"이라고 그 의미를 전했다.  이토록 깊이 있고 알면 알수록 가치 있는 메시지가 담긴 '자산어보'다. 매번 이야기의 힘으로 관객을 홀리고, 이처럼 곱씹을 수 있는 삶의 가치와 여운을 전하는 이준익 감독의 기조는 늘 한결같다. 감독은 "오늘같이 내일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내일 뭐가 되어야지 하면 평생 오늘을 못 산다. 그저 오늘을 살라"고 삶의 가치를 전한다. 그저 주어진 오늘의 인생을 즐기는 감독의 여유와 낭만은 여전했다.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