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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송' 김의성, 뼛속부터 좋은 사람 [인터뷰]

    의외로 다정하고 상냥하다.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곳곳에 배어있다. 배우 김의성에게 '좋은 어른의 표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였다. 그런 그가 영화 '특송'을 통해 선보인 캐릭터는 이제 보니 최적화된 맞춤형 캐릭터다.   영화 '특송'은 특송 전문 드라이버 은하(박소담)가 예기치 못한 배송사고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추격전을 그린 범죄 오락 액션이다. 부산항 대교가 한 눈에 보이는 운치 있는 폐차 처리 영업장. 실상은 특송 전문 회사인 백강산업을 운영하는 백사장은 돈 되는 의뢰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프로 비즈니스맨이다. 계산이 철저하고 돈 밝히는 속물 같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속 깊은 인물이 또 없다. 탈북 과정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어린 은하를 구한 이후, 그는 은하의 둘 도 없는 가족이자 스승이 되어준 존재다. 겉으론 수익 배분 문제로 은하와 시종일관 티격태격하고, 고용된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그들을 진심으로 애정하고 아끼는 백사장이다.  김의성은 이런 백사장의 능청스러움부터, 은근한 속물 근성과 유머러스함, 그리고 감춰진 강렬한 카리스마까지 발산하며 많지 않은 분량에도 인물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백사장과 성격적으로 닮은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고 말문을 연 김의성은 "부하 직원들과 가족이나 친구같이 격의 없이 지내고 생각과 결정이 빠른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그는 백사장이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드러내기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 백사장과 은하, 그리고 백강산업 직원들이 얼마나 끈끈한 관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스토리를 쌓아가는 연기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백사장이 하는 말들이 이전에도 수십 번, 수백 번 해왔던 대화들로 느껴지게끔 하는 것이 목표였다"는 그는 은하와 돈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실랑이를 벌이는 것, 직원 아시프에게 '카레 먹으면 다 인도 사람이지'라는 식의 어떻게 보면 차별적인 발언을 함부로 하는 것들이 익숙하게 보이길 바랐다. "함부로 거칠게 말하는 것 같아도 서로 간에 애정과 이해가 전제돼 있는 뉘앙스를 풍기고 싶었다. 그래야만 후반부 백사장의 희생적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의성은 말투는 퉁명하고 투박해 보여도 인정 많은 백사장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직업적인 매력도 있었다. "설렁설렁한 것 같지만 한편으론 따뜻한 마음도 있고, 그 이면에 어둡고 미스터리한 과거를 가진 인물이라 지금도 합법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과거엔 얼마나 더 불법적인 일을 했을까 궁금했다"고.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금고 안에 샷건이 들어있단 충격적인 설정이 주어졌나, 이 사람의 현재 삶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들을 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은하가 있었다. 백사장은 극 중 묘사되길 과거 탈북자 브로커를 하며 은하를 처음 만났다. 김의성은 백사장이 어린 은하를 구출한 이후부터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를 상상하며 은하에 진심 어린 애정을 쏟았다. "이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인 은하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이 영화에서 붙잡을 동아줄이라 생각했다. 백사장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연기를 할까 하는 고민은 다 제쳐놨다. 나에게 은하는 어떤 존재이고, 은하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길 백사장은 60이 가까운 나이에 혼자 살고 있다. 과거엔 가정도 꾸리고 가족들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매무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 외톨이 같은 사람이다. 백사장이 은하를 북한과 러시아 국경에서 구출했을 때 '둥지에서 떨어진 피투성이 어린새' 같단 생각을 했을 거다. 자신이 구한 어린 새 같은 존재, 그때부터 사춘기를 다 지나 현재까지 함께 산, 그리고 저가 키운 딸이자 믿음직한 동료처럼 여겼을 거다. 물론 죽어라 말을 안 듣는 말썽쟁이 기도 하지만, 이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어쩌면 그렇게 돈을 밝히는 인물이 실상은 금고에 쓰지도 않을 돈다발을 모아두는 건 은하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나이 먹은 아빠가 바라보는 딸에 대한 애틋함이 보이기도 했다고. "은하는 백사장에겐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정의한 그는 "영화에선 이런 관계성을 다 드러낼 수 없어도, 이런 마음들이 모여 은하를 향한 백사장의 따뜻한 애정과 후반부의 결단 등이 가능하게 해 줬던 것 같다"고 했다.    김의성은 이처럼 자신을 돋보이고 내세우기보다 이런 깊이 있는 관계성을 통해 오히려 더욱 구체적인 캐릭터로 구현돼 생동감을 전한다. 그의 몸에 밴 배려와 연기에 대한 고찰이 더불어 발현된 좋은 예가 아닐까. 특히 백사장이 모두에게 대가없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닌, 분명한 자신만의 울타리가 있고, 이를 지키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욕망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라는 묘사는 김의성의 세밀한 연기력으로 공감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배우가 구축한 디테일한 묘사가 곳곳에 엿보이는데, 이를테면 백사장이 은하를 좇는 악당 무리와 마주친 신이다. 그는 상상하지 못할 끔찍한 아픔을 표현하는 것도 백사장에게 어울리는 그만의 방식이 있을 거라 여겼다. 이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고민을 했고, 결과적으론 그럴듯하게 보인 것 같아 안도했다는 것이다.  백강산업 폐차장 세트도 배우로선 매혹적인 장소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간이라는 그는 "폐차장 세트를 정말 공들여 잘 만들어주셨다. 바로 옆에 탁 트인 바다가 있고, 어떻게 보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동화적인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3~40년의 세월이 담겨 있고 그 세월에 풍화된 듯한 리얼한 느낌"에 매료됐고 만족했다. "사실 배우라는 존재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캐릭터와 잘 들어맞는 멋진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그동안 연기를 위해 준비하고 고민하고 걱정했던 것들이 절로 풀리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백사장이 고수하는 하와이안풍 셔츠 패션도 "화려한 프린트지만 이미 낡은 듯 색이 바랜 듯한 느낌"을 일부러 강조했다. 이처럼 모든 어우러짐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김의성이다. 함께 한 배우들도 하나하나 거론하며 칭찬을 거듭하는 그의 모습 역시 인상 깊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배려, 그리고 존중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 본연의 선함에 좋은 어른, 좋은 사람이란 표현이 절로 따라붙는 것일 테다.  오래도록 연기를 하며 물론 힘든 순간도 있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구멍에 빠진 적도 있지만 그는 극복하는 법을 이미 터득했다. "연기라는 존재 자체가 제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게 가장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돈을 버는 일이 다 다를 수 있는데 제게 배우란 세가지를 다 충족시켜주는 직업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도 좋고 감사하다. 불안하다고 치면 한 없이 불안한 직업이지만, 지금 제게 주어지는 기회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다. 돈 값 하는 배우, 같이 일하기 좋은 파트너란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자 자부심이라는 배우 김의성이다.    사진=NEW, 엠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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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송' 송새벽, 고유의 악역 연기로 일깨운 공포심리 [인터뷰]

    평범한 듯 보이지만 날카롭고 서늘하다. 인간의 잔혹함과 이중성을 드러내는 그 모습이 두렵고 공포심을 일으킨다. 영화 '특송'에서 송새벽이 그려낸 비주얼이다.  영화 '특송'에서 송새벽이 맡은 경필은 종잡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인물이다. 그동안 비리 경찰, 부패 경찰은 익숙하게 봐왔어도 직접 깡패 조직을 거느리는 경찰은 그야말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다. 송새벽은 이처럼 비현실적인 설정의 인물을 마치 어디선가 존재할 것만 같은 현실성을 갖게 한다. "얜 모세고, 난 예수"라며 무리의 길을 가르는 능청스러움, 불법 자금 300억을 빼돌린 배신자를 향해서도 날 선 모습이나 분노로 폭주하긴 커녕 도리어 여유롭다. 쉽게 감정을 예측할 수 없고, 그렇기에 더 공포스러운 인물이다. '한국판 게리 올드만'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당연했다. 영화 '레옹' 속 비리 경찰 스탠스 역으로 수많은 관객의 뇌리에 박힌 게리 올드만을 연상케 하는,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강렬하고 독특한 감상을 전한 그다.   송새벽에게도 경필은 "경찰이자 악당 우두머리라는 것이 연기자로선 굉장히 흥미로웠고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었다. 경필은 프로야구 승부조작으로 조성한 300억 원의 불법 자금을 빼돌려 해외로 도주하려는 전직 야구선수 두석(연우진)의 배신을 알고 오히려 흥미를 느낀다. 상황은 꼬이고 두석의 아들 서원(정현준)과 그를 보호하는 특송 드라이버 은하(박소담)를 집요하게 추적할 때도 경필은 마치 이를 즐기는 듯한 태도다. 공권력이란 절대 힘과 불법 조직의 야만성까지 갖춘 절대자 경필에게 은하는 가소로울 법도 하다. 그의 태연함이 긴박하고 필사적인 은하와 서원의 상황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오히려 그 괴리감이 주는 공포가 상당하다.  송새벽은 경필이 어떤 인물인지를 생각했다. 시나리오에선 경필의 집착과 욕망의 목적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경필의 라이프스토리를 덧칠하며 상상하길, 분명 돈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찢어지게 가난해서 어른이 되면 무조건 돈을 많이 벌거란 생각을 가졌거나, 도박성으로 큰 낭패를 봤다거나 하는. 하지만 악당을 잡으려고 경찰이 됐을 법도 한데, 이를 악용해 나쁜 짓을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결국 그는 "당위성을 찾자면 무슨 사연은 분명 있었을 것 같다. 그런 부분들이 나이를 더 먹을 수록 분노와 폭발로 터진 듯한 느낌으로 인물 분석을 했다. 조경필은 다이렉트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놈이야, 내 말이 법이야'라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능청스러운 '예수' 드립을 치거나 탈북민을 두고 '빨갱이'라고 혐오하는 그의 모습은 특히 경필의 이중적인 잔혹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대사이기도 했다. "이 인물을 딱 제시하는 듯한 그런 단어이자 대사였던 것 같다"고 언급한 송새벽은 "특히 예수 모세 운운하는 것이 굉장히 재밌고 좋았다.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상반된 느낌이 들지 않나. 감독님께도 그 지점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고, 과거에 경필이 교회를 다녔을 수도 있고 혹은 지금도 다닐 수 있겠단 생각도 했다"고 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신이 나왔어도 재밌었을 것 같단 말도 덧붙였다. 송새벽은 이처럼 캐릭터를 향한 다층적인 접근을 통해 유니크한 빌런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송새벽은 경필의 날선 이미지를 위해 4~5kg를 감량하기도 했다. 이전 영화 '진범'에서도 아내가 살해당해 피폐해진 남편의 모습을 위해 당시 7kg을 감량했던 그다. "감량도 연기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경필은 돈이 먼저인 사람이기에 음식도 많이 안 먹고 항상 날이 서 있을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좀 더 날카롭고 슬림한 이미지가 어떨까 싶었다"고 분명 피나는 노력을 했을 터인데도 덤덤하게 말한다.   늘 악역을 연기할 때면면 속앓이를 했던 그는 이번에도 역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잠도 잘 못 자고, 음식도 잘 못 먹고, 식은땀에 젖은 채로 깰 때도 많았다. 역할 자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더라"고. 특히 아무리 연기지만 소담과 어린 현준에게 행하는 잔혹한 신들이 신경이 쓰이고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 노파심에 걱정하기도 했단다. 알고 보면 이토록 여리고 섬세한 구석이 있다.  역대급 캐릭터를 경신하고도 스스로 연기에 만족스럽진 않다고 자신에 대한 박한 평가를 한 그지만, '특송'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눈과 귀가 흥분되는 영화고 개인적으로도 시원하게 찍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도 통쾌한 느낌에 스피드한 전개와 리듬감을 갖춘 재미있는 영화"라고 자부한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땐 "어떻게 너처럼 내성적이고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애가 연기를 하느냐"는 지인들의 반응이 많았단다. 고등학교 때 옆자리 짝꿍하고만 말할 만큼 소극적인 학생이기도 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매 작품마다 감쪽같은 변신으로 천의 얼굴을 보여주는 그를 보면 배우는 천직이다. 그가 그려낼 새로운 얼굴도 몹시 기다려지는 바다. 이에 "앞으로 어떤 배역을 연기해보고 싶단 생각은 딱히 구체적으로 해보진 않은 것 같다. 다만 달달한 이야기,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를 해보고 싶단 생각은 했다"며 쑥스러운 미소다.  좋아하는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 OST까지 계속해서 들을 정도다. 볼 떄마다 늘 새로운 감상이 드는 영화라고. 현재 제주도 애월에서 사는데 동네 주변이 다 산인 부락 같은 마을이란다. "제가 워낙 시골 놈이다. 아내는 완전 서울 여자라 처음엔 걱정했는데 웬걸 봄이면 고사리를 캐러 다니고 저보다 더 잘 지낸다. 아이들도 들판에서 뛰어다니는 걸 보면 좋다. 다만 아쉬운 건 야식 배달이 안 되고 치킨을 시켜도 세 마리는 시켜야 배달이 된다"고 의외로 능청인 그에게서 행복감이 가득 묻어난다. "오늘도 무사히를 목표로, 새로운 성격의 인물을 연기할 수 있길 막연히 바란다"는 배우 송새벽의 평범한 듯 평화로운 바람이다.    사진=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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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 긴 휴가를 마친 그의 특별한 진심 [인터뷰]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이가 소박하게 전하는 진심이 그리도 따뜻하고 다정할 수가 없다. 영화를 다시 찍기까지 무려 23년, 그 지난하고 지난한, 오랜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다사다난했겠냐만, 그저 소모되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소중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로 돌아온 그가 그저 반갑디 반갑다. '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의 특별한 귀환이다. 1996년 한국영화사에 흔치 않은 여성 영화 '코르셋'을 첫 연출작으로 내놓고 2년 후 당대 최고의 아이돌 젝스키스를 배우로 기용해 화제가 된 청춘영화 '세븐틴'을 끝으로 정병각 감독의 작품 활동은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물론 영화 일은 꾸준히 해왔으나 새 작품으로 근황을 알리지 않은 탓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혔다. 그런 그가 23년 만에 신작 '싸나희 순정'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 무려 23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감회가 남달라도 한참은 다를테다. "매일 반응을 찾아보고 있다"며 너털웃음인 그는 "제가 의도했던대로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좋게 봐주셔서 정말 너무 고맙더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고마움과 안도감, 뿌듯함을 넘어 형언할 수 없는 만감이 담긴 듯했다. 류근 시인과 퍼엉 작가의 스토리툰 '주인집 아저씨'를 원작으로 한 '싸나희 순정'은 삶에 지친 시인 유 씨(전석호)가 도시를 떠나 어느 시골 동네 마가리에 뜻하지 않게 정착해 동화작가를 꿈꾸는 뽕밭 주인 농부 원보(박명훈)의 집에 머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담백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련하고 따스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소박하고 소중한 힐링 영화다. 오래도록 연출을 쉬는 동안 그는 솔직하게 "슬럼프를 겪었다"고 했다. "연출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문을 연 감독은 "두 번째 작품 이후 영화와 제 자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고민이 길어질 때 상업영화의 흐름도 2000년대로 들어서며 많이 바뀌고 엄청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그 흐름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당시 동료들을 만나면 올림픽처럼 4년에 한 번이라도 영화를 만들자며 자조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라도 작품을 내는 사람이 '행운아'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모두들 희미해지고, 퇴색되며 잊혀 갔을 테다. 이를 겪는 당사자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어쭙잖은 위로로도 감히 달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야속한 세월이 흐르던 차에 감독은 류근 시인의 원작을 보게됐다. "시인도 시인이지만, 시골 마을에서 만난 주인집 아저씨의 성품과 기질이 정말 좋았다. 류근 시인의 번쩍이는 재능이 곳곳에 스며든 이야기가 정말 매력적"이란 감상이 들었다. 처음엔 스스로 연출을 맡게 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기획에만 참여했다. 영진위 제작지원을 신청하는 단계에서 감독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제 이름으로 냈는데 3수 끝에 선정이 됐다. 어떻게 보면 얼떨결에 덜컥 복귀를 하게 된 셈이다. 후배 작가들과 공동 작업으로 각색에 몰두할 때부터 설레기 시작하고 차츰 실감이 들더란다.     ▲ '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   원작은 시인 유씨와 원보가 나누는 이야기가 주다. 간혹 마을 사람들 몇몇의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원보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이에 감독은 정겨운 마가리 마을 사람들과 그들 각각의 사연을 그려내며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인생의 길잡이 같은 원보를 비롯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마가리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다정하고 풍만한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각박하고 메마른 감성의 유 씨도 이들을 통해 삶의 무력에서 벗어나 위안과 정을 나눈다. 어쩌면 별 거 없는 소박한 이야기가 그리도 따뜻하고 소중할 수가 없다. 감독은 이들을 통해 동질감을 많이 느꼈고 그가 느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유씨는 시를 쓸 수 없는 시인으로 나온다. 알다시피 오랫동안 영화를 못 만드는 감독으로서 저하고 많이 겹쳐져 보였고 교감이 많이 됐다. 원보는 제가 닮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제가 받는 힐링과 위안은 우리 주변에서 보는 아름다운 사람들 때문이다. 작게는 선뜻 자리를 양보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준다거나 하는 선의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아직은 쉽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들이라 이를 보면 아직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 말하길 우리는 '개인'으로 살 수 없다. 다 같이 더불어 사는 삶에서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맺으며, 또 그 도움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런 작지만 소소한 관계가 삶을 지탱하는 힘을 주고 행복을 얻게 한다고. 이런 마음이 잘 녹아난 이야기였기에 그 역시도 두렵지만 다시 카메라를 들 수 있었을 테고, '싸나희 순정'엔 그런 감독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진심은 실제로 많은 이들을 움직였다. 박명훈 전석호를 비롯해 크고 작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반가운 배우들이 마가리 주민들로 등장한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더하다. 이들은 서로의 인연이 닿고 닿아 한 자리에 모였고, 출연료를 자진 삭감하며 영화에 대한 진심을 모았다. 이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전한 감독은 "결과적으로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처음엔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작품을 좋게 봐주신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정말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어릴 땐 실감을 못하던 자녀들이 성인이 돼 23년 만에 아빠가 만든 영화를 보고 "아빠가 영화감독이 맞긴 맞네"라고 이야기했단다. 가족들의 인정만큼 더 큰 기쁨은 또 없을 테다.   그렇게 감독에게도 '싸나희 순정'은 특별하고 소중한 작품이다. 막상 촬영 당시엔 저예산 영화의 한정적 스케줄, 계속되는 태풍과 장마 그리고 찌는 듯한 무더위로 애를 먹었지만 고생 끝에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마을 풍경들을 담을 수 있었고, 더욱 리얼한 배우들의 열연을 담아낼 수 있었다. 감독에겐 이 모든 것이 돌이켜보니 그저 '행복'이었다. "동료나 선배들도 다들 힘들어한다. 저도 마찬가지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창작을 업으로 삼는 아티스트들은 다 그럴 거다.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은 소수다. 하지만 힘들어도 살아진다. 물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 모든걸 견디며 삶을 배우는 거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삶도 변화하고, 그렇게 견디며 배우며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제가 이렇게 운 좋게 멋진 작품을 만나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듯, 그 믿음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정병각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아직 우리 사회가 살만한 세상이란 걸 보여주고 싶은'순정'이 있다.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돋보이고, 그들이 골고루 이뤄나가는 이야기들로 이뤄진 드라마. 그리고 대사나 연기만이 아닌 춤과 노래, 시. 일종의 문학적인 장르를 끌어들여 종합적인 예술을 담아내는 작품. 그가 추구하는 낭만적인 작품 세계다. "비록 큰 개성은 아니지만 제 작품의 특징이고 갖추고 싶었던 모습이다. 또 영화를 할 기회가 주어지면 이를 좀 더 좋게 다듬어서 보여 드리고 싶다"는 감독의 바람이다. 여전히 낭만을 꿈꾸고 진심을 전하는 정병각 감독의 작품 세계를 오래도록 보고 싶다.    사진=(주)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