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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 이하늬, 우아한 절제와 발산 [인터뷰]

    우아하면서도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인물의 황홀한 몸짓에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다. 고도로 절제된 감정 이면엔 뜨겁게 일렁이는 애수가 넘치고, 기품 있는 동작으로 세련된 액션 쾌감을 선사한다. 차갑고도 뜨겁던 비극의 시대 속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 속 이하늬다.   1933년, 일제강점기 시대 경성. 조선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 버건디 코트와 재킷, 롱 스커트, 워커 차림의 꼿꼿한 자세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 뛰어난 재력가 집안의 자제답다. 하지만 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여인의 절제된 눈빛에는 언뜻 번뜻 미세하게 드러나는 아픔이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심어진 항일조직 흑색단 단원 '유령'으로 의심되는 첫 번째 용의자다.  이하늬가 맡은 차경은 극의 처음부터 '유령'임을 명시하는 캐릭터다. 그의 시점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고립된 밀실에 갇힌 후 이 함정에서 무사히 벗어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표가 주어진 인물이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비롯해 수많은 단원들의 죽음을 봤다. 하지만 깊은 슬픔에 지지 않고 강인하면서도 결연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특히 조선 최고 재력가 집안 딸로서 보장된 삶이 있음에도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이하늬는 차경이 "아마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거란 생각이다.  "재력가 집안에 태어났으면서 목숨 내놓고 독립투사를 할 수 있을까. 차경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극 중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란 대사가 있다. 그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했을까. 사람이 살아갈 때는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며, 한 순간에 무의미한 흙으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며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처음엔 너무 허무하고 해석하기에도 웅장하고 버거웠다. 그러다 차경 대사 중에 '살아. 죽는 건 죽어야 할 때, 그때 죽어'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 차경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는 찬란한 삶을 노래하며 살지만, 그 시절 독립 위해 삶을 내놓은 사람들은 '죽음을 위해 사는 삶'이었을 거라고.  비극의 시대를 버티고 맞서며 살았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하지만 이하늬는 그럴수록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다. "삶을 투쟁하며 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슬픔을 표출하지 않고 얼마나 응축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인지를 그리려 했다. 그 속에서 차경이 보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느낀 차경은 회색의 질감을 가졌다. "내면은 아주 뜨거운 빨간색 마그마가 끓고 있지만 절대 드러내지 않는." 이하늬는 나직한 저음으로 토로되는 감정과 결연한 행동까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물의 심리를 수려하게 표현해 낸다.    근래 접해보지 못한 캐릭터라 차경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것이 좋았단 이하늬는 "쪽빛 하늘에 물들듯,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캐릭터의 한 장면, 한 얼굴, 그 찰나가 생각난다면 저는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관객에겐 한 신으로 기억될 장면이지만, 이하늬는 인물의 깊이 응축된 감정을 켜켜이 쌓아갔다. "처음과 후반의 차경이 다르다. 이 캐릭터도 변모하며 나아가고 있다. 슬픔의 모노톤을 조금씩 벗겨가며 앞으로 뚜벅뚜벅 전진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상적 걸음걸이와 후반부 액션신의 걸음걸이가 다르다. 처음 밀실에 갇힐 때 정면을 응시하는 단단함도 달랐다. 제가 음악을 오래 해서 대사도 음처럼 듣는 경우가 많은데 캐릭터 구축할 때 차경은 조금 울림이 있고 깊이가 파져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의 것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 이처럼 뜻밖의 디테일들을 심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하도 절제된 인물로서 차경을 그리다 보니 꽤 어렵기도 했단다. "어떤 예술의 형태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경지에 오르는 게 정말 극상의 작업이라 생각한다. 국악을 오래 해서 그런지 아주 정적인데 손하나를 탁 치는 순간 나오는, 가느다란 선에서 나풀대는 미학의 아름다움. 이를 떠올렸다. 일차적인 연기 너머에 있는, 아무것도 안 하는 듯 보이지만 수많은 레이어들 사이의 끝에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길 바라며 최대한 절제해 연기했다"고.  절제된 인물의 액션은 오히려 절도있고 우아하다. 이하늬는 "액션이 확실히 늘은 것 같다"며 환한 미소다. "근력은 체력이다. 꾸준히 몸을 단련시켰고 두들겨 맞자. 많이 맞으면 맷집이 생겨 오히려 안 아플 거란 생각도 했다"고 은근히 웃기기도 한다. 덧붙여 "차경의 액션은 흔들려선 안 됐다. 여기서 보이는 에너지가 차경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지를 나타내기에 더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많이 받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어설펐던 모습도 많이 익숙해지더라"고. '유령'은 항일영화지만 우아하고 매혹적인 미장센과 더불어 통쾌한 판타지까지 기존의 일제강점기 시대극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하늬는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정말 반가운 영화적인 영화였다. '아, 이런 게 영화였지' 하는 느낌이다. 저도 집에서 OTT를 편하게 보는게 익숙해진 시대지만, 이렇게 완전히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영화적 재미와 쾌감이 확실했다"는 소회다.  마지막으로 이하늬는 겨울이 추워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떤 역경에도 꺾이거나 변하지 않았던 비극의 시대. 그래도 낭만과 희망을 꿈꿨던 사람들에 대해 위안을 전한다. "이 것이 우리 영화의 메시지라 생각했다. 참 많이 와닿았다. 지치지 않고 될 때까지 한다. 이런 근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지금의 K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며 "저한테 여러 인생의 분기점이 있지만, '유령'은 제 배우 인생에 새로운 분기점이 되는 영화"라고 각별한 애정을 전했다.      사진=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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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경구의 '유령' 찬미 [인터뷰]

    역시 압도적인 무게감이 있다. 복잡한 내면 심리를 가진 인물의 철저한 이중성으로 끊임없이 관객을 교란시킨다.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 속 설경구다.  1933년, 경성. 명문 무라야마 가문 7대손으로 조선말과 사정에 능통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엘리트 군인이었으나 불미스러운 가정사로 좌천돼 경무국 소속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으로 파견된 무라야마 준지. 그의 냉철하고 차가운 눈빛 이면에는 들끓는 분노와 수치,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런 복합적인 속내를 반영한 듯한 도마뱀 같은 초록색 의상,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 잡힌 제복 차림은 설경구의 또다른 모습을 예고한다. 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매번 새로운 얼굴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이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감독은 장르물로 접근하고 싶다고 했다. 장르적인 색감과 결이 다른 작품이라 관심이 갔고, 그 시대를 착장한 것만으로도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작품을 하게 됐다"고 말문을 연 설경구다. 꽤 날카로워진 얼굴은 "군인 캐릭터 설정이기에 얼굴에 각이 살아났으면 해서 살을 뺐다. 아무래도 군인인데 두리뭉실해 보이면 안 되잖나"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조선총독부에 심어진 항일조직 스파이 단원 '유령'으로 의심받는 다섯 명의 용의자들. 그 중 하나가 설경구가 맡은 일본인 준지다. 그는 유력한 용의자임에도 '유령'의 혐의를 벗고 진짜 '유령'을 찾아내 다시 화려하게 일선의 지휘부로 복귀하고 싶어 한다. 이에 악랄하고 지독하게 '유령'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의 출신 성분이 의심과 혼란을 거듭하게 한다. 설경구는 마치 안개 같은 캐릭터다.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속내와 표정은 관객의 긴장과 혼돈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설경구는 제가 맡은 준지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기능적인 역할을 맡은 캐릭터라고 했다. 이에 충실하게 연기하는 것이 '유령'이 시작이었다. "혼선을 주고,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하고, 정확한 꼭지점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의심하고 의심받는 캐릭터"로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접근이었다. "준지의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지우려고 하는 준지의 모습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또한 준지의 치욕이자 콤플렉스가 된 비극의 가정사는 그를 더 강압적이고 집착적으로 매달리게 했을거란 설명이다. "군인 명문가 7대손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갖는 반면 계속해서 혈통이 부딪혀 속은 콤플렉스 덩어리다. 그가 버티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집착적인 성공이다. 그가 끝없이 올라가려는 것은 야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꽤 연민이 갔다"고. 인물의 감정을 단정 짓기가 퍽 어려웠다. "한 가지 감정으로 설명이 안 된다. 치욕과 분노도 있을 거고, 참 복합적이다. 엄마를 저주하진 않았을 거다. 분명 애정했을 거다. 그런 감정들을 나열하기 참 어렵다. 저도 모르겠다. 준지의 속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탁월한 소화력을 자랑한 설경구다.    이해영 감독과의 작업은 처음이었다. "과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색감에 대해선 굉장히 다른 눈을 가진 것 같다. 과감한 색감을 쓰고, 꼼꼼하고, 정확하게 딱 떨어지길 바란다. 저도 애드립을 안 좋아하는 편인데 계산적인 연출을 하는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확고한 디테일 때문에 나름 애를 먹기도 했단다. "제복 입었을 때 모자 중심점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 '좌측 모자챙 1mm만 내려줘' 이런 식이다. 머리에 쥐 나고 하도 깃을 세워서 목에는 힘이 들어가고 그런 건 불편했다. 공화당 신은 특히 장시간 찍어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모자를 쓰지 않겠다고 우겼다. 가죽 롱코트를 입으니 만만치가 않고 이걸 입고 액션을 하는 것도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볼멘소리다. 하지만 "의상 색감이 참 부담스러웠는데 입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제가 초록색 코트를 언제 입어보겠나. 또 그 안에는 진한 자주색 베스트를 입는다. 참 멋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봐왔던 그 시절 흑백 사진에 과감한 색을 입히고, 모든 신을 마치 한컷한컷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닦아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큰 애정을 가졌구나 싶었다"고 감탄하는 그는 역시 '츤데레'의 전형이다.  이어 설경구의 '유령' 찬미는 계속됐다. "거친 것도 있지만 섬세함도 있다. 색감이 세게 입혀지니까 초반엔 보면서 정말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통쾌한 판타지를 녹여낸 스토리에 흡족함을 드러낸다. "정말 반가웠다. 그동안 너무 투톱 브로맨스만 많지 않았나. 시대적 장르 영화지만 여성 캐릭터의 전사로 시작되는 영화인데다 여성 액션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고, 더 강렬해도 괜찮단 생각을 했다. 정말 매력적이었다"는 그는 "초반의 이솜 씨는 짧은 분량에도 너무 강렬했다. 마지막 이주영 씨 착장도 강한가 싶지 않나 했는데 오히려 그 색깔이 강렬하게 각인되고 생각이 나더라. 이 영화는 이하늬와 박소담이 끌고 간다면, 시작은 이솜이 열고 끝은 이주영이 닫았다고 생각한다"며 여배우들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낸다.  특히 함께 액션 합을 맞춘 박차경 역의 이하늬에 대해 "액션 상대로 정말 훌륭한 배우다. 상대와 액션 합이 안 맞을 때 짜증을 내면 아무리 선배라 해도 부담스럽고 신경쓰인다. 하지만 안 맞는 순간에도 전혀 티를 안 내고 촬영 내내 너무 밝은 에너지를 줬다. 하늬 씨 덕분에 즐겁게 촬영했다"고 고마워했다.  반면 자신에겐 "호텔 내부에서 손 끝에도 긴장감이 있어야 하지 않았나, 왜 좀 더 촘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야박한 자평이다. 무려 31년 차 배우임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연기엔 인색한 그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행복감만은 확실히 자부할 수 있다. "초창기에는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되나. 그냥 연기를 하던 순간이 있었다. 이 촬영 끝나면 다음 작품 하고 있는 그런 날들, 어느 순간 '아 추락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불한당'으로 구제, 아니 구원을 받으면서 소중함을 느꼈다. 감사해졌다. 현장에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자산어보' 찍을 때도 섬이란 특수성 때문인지 아침 일찍 촬영장에 가서 이정은 씨랑 바다 보면서 '정은아, 정말 행복하지 않냐' 이렇게 얘기했다. 스태프들은 분주하고 역동적으로 촬영을 준비하고 있고, 이 현장에서 숨을 쉰다는 것이 감사했다." 이 솔직 담백한 어느 날의 감상이 그가 깊이 간직한 진심이다.  아직 그는 연기에 절실함을 느끼고 싶진 않다. 절실하면 괜히 오버할 것 같아서란다. "절실함보단 감사함을 느끼며" 연기하고 싶다. "현장에 있는 걸 계속 감사해라." 31년 차 배우가 늘 되뇌는 말이다. 그 안에 말로 다 못한 깊은 애정과 소중함이 깃들었다.      사진=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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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의 변수, 박소담의 장악력 [인터뷰]

    배우 박소담은 찰나에 시선을 사로잡고 현혹시킨다. 영화 '유령' 속 그가 보여준 놀라운 장악력에 그저 넋을 놓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발적인 매력을 무기 삼아 조선인임에도 총독부 실세인 정무총감 직속 비서 자리에 오른 유리코는 거침없이 당당하고, 실로 안하무인이다. 조선총독부에 숨은 항일조직 스파이 '유령'의 용의자로 의심받고 호텔에 끌려와도 안팎을 휘젓고 다니며 앙칼지고 겁 없이 행동하는 인물이다. 자신을 방해하거나 모욕감을 준 이에겐 반드시 되갚는다. 하지만 표독스럽고 도발적이며 강한 기질의 그녀가 갑옷처럼 두른 화려한 의상을 떨쳐낼 때, 단번에 그의 전사까지 납득시킬 만큼 강력한 전율이 인다. 박소담은 그야말로 '유령' 속 압도적 변수이자 비책이다.  박소담은 쏟아지는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저희 가족이 솔직하고 객관적이다. 그런데 여동생이 따로 카톡으로 '영화 정말 재밌게 잘 봤고 고생 많았겠다'고 보내줘서 정말 감동했다"고 털어놨다. 곧이어 "제가 유리코를 해낼 수 있었던 건 감독님과 선배님들 덕분"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의례히 하는 말이 아니라 유달리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령' 촬영 당시 그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꼈지만 영문을 몰랐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악착같이 연기했다. 후시녹음까지 마쳤을 때 결국 목소리가 안 나왔다. 갑상선 유두암이었다. 배우로서 목소리를 잃는단 두려움에 겁이 나기도 했다. 박소담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유령' 팀의 배려와 따뜻한 에너지 때문이었다고 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 가장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그는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냥 힘든가? 싶었다. 제가 계속 물 젖은 솜처럼 처지는데 이하늬 선배님이 마치 엄마처럼 늘 제 상태와 컨디션을 챙겨주셨다. 촬영하는 내내 혼자 스스로 의심도 많이 하고 자책도 컸는데 모두 정말 많은 에너지를 주셨다. 하늬 선배님께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하냐고 했을 때 '돌려주려 하지 말고 다른 후배들에 주면 돼'라고 하셨다. 정말 큰 감동이었다. 저도 그렇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팠던 덕분에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았다"고 했다. "제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아 그분들께 기댈 수 있었다. 제가 좋은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건 이분들 덕분이라 요즘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영화 속 유리코는 펄떡이는 생동감으로 극을 휘어잡는다. 박소담이 얼마나 필사의 노력을 했을지가 눈에 선하다. 하지만 모든 연민의 감정을 배제하고 박소담은 단연 독보적인 활약을 한다. 특히 의상부터 컬러풀한 핸드백, 모자, 액세서리, 과감한 퍼 소재와 레이스, 코르셋, 드레스 등 현란하고 화려한 코스튬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이에 박소담은 "처음에 의상을 입으러 피팅룸에 갔을 때 정말 너무 화려하고 많았다. '이 모자에 이 퍼에 이 장갑까지 다 한 착장인거죠?'라고 되물을 정도였다. 보통 포인트로 하나만 착용하지 않나. 평소에도 그렇고 캐릭터적으로도 입어볼 일이 없는 옷들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화려함의 절정인 오렌지 색깔 드레스는 용의자로 갇혀있는 호텔 방의 소파 색과 일부러 맞춘 것이라는 귀띔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디테일을 잡은 의상이다. 처음엔 어색해서 잘 어울리는지 계속 의심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화려한 메이크업, 모자, 펄 등 이런 의상과 소품들이 유리코에겐 정체를 감추기 위한 갑옷이었다. 입고 있을 땐 정체를 숨길 수 있어 감사했고 하나하나씩 벗어던질 때마단 희열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한 의상이었다"고.    박소담은 유리코의 자유분방함과, 그 이면에 깊숙히 감춰둔 외로움을 연민했다. 그는 "처음 대본을 볼 때 캐릭터 설정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얘는 또 어떤 말을 내뱉게 될까' 스스로도 걱정했다. 천계장(서현우) 대사처럼 '유리코짱, 어쩌려고 저래'라는 마음이었다"고 너스레다. 심지어 제 앞에 놓인 성냥을 두고도 일부러 멀리 있는 차경(이하늬)을 불러 불을 붙이라고 지시하는 신에선 "감독님, 이거 너무 가까이 있는데요? 이 정도면 제가 해도 되는데"라고 민망했을 정도다.  하지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인물이라 표현의 자유가 있었다"며 "유리코는 다 해도 되겠다 싶었다. 뭘 해도 '쟤 왜 저래?' 싶을거고, 그러면서도 그러는 이유가 나중에 타당하게 설명이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길 유리코는 철저히 자기 자신과 정체를 숨긴 채 모두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깔을 부리며 혼자 쏘아대고 다닌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혼자 외로웠을지, 그렇게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 게 아니었겠느냐며. "어떻게 정무총감 직속 비서까지 오르게 됐는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을지, 그러면서도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혼자 견뎌냈다. 유리코가 '괜찮아 난, 죽어도'라는 말을 그렇게 덤덤하게 내뱉기까지 얼마나 아팠을까 싶었다." 박소담은 그토록 쏘아대며 다니던 유리코가 막상 살이 다 타들어가고 찢겨가는 고통 속에서는 어떻게든 이 악물고 참아내는 모습이 가엾고 안쓰러웠다. "제가 감히 그 당시 이런 이들의 마음과 아픔을 설명할 순 없고 익숙해질 것 같진 않지만, 너무 감정 몰입이 되면서 정말 잘 표현해내고 싶었다"는 그의 진심이다. 그렇기에 그가 느낀 엔딩 신의 감동은 더 컸다. "배우로서도, 배역으로서도 마지막에 그런 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게 정말 뭉클했고 기뻤다"는 감상이다.  유리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그는 "한 작품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드릴 수 있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투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유리코의 다채로운 변주와 엄청난 활약은 지켜보기 즐겁다.  "하루하루,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행복하다"는 박소담은 "기회가 되면 기타를 배워서 직접 기타치며 노래하는 팬미팅을 해보고 싶다. 그 생각을 20대 때 했는데 벌써 30대가 됐다"며 웃는다. 재밌게 살기로 다짐도 했다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감을 더 소중하게 느끼며 누릴 수 있는 그는 지혜롭고 용감하다.    사진=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