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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수' 박정민, 또 다시 '인생캐' [인터뷰]

    어떤 배역이든 이질감 없이 곧잘 해낸다. 어느 한 이미지로 단정지을 수 없는 폭넓고 다채로운 배우다. 매번 놀라운 '인생캐'를 경신하는 박정민이 영화 '밀수'에서 또 다시 빠져들 수 없는 마력을 떨쳤다.  70년대 해녀들의 밀수 이야기를 그린 류승완 감독의 범죄해양활극에서 박정민은 막강한 신스틸러 장도리로 등장한다.  평소 류승완 감독의 팬이었고 단편 영화 '유령'을 함께 했던 박정민은 캐릭터 설명을 듣기도 전에 감독의 캐스팅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다. "제겐 감독님 영화가 늘 새롭게 다가왔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감독님께 요즘 말로 '입덕'을 했다. 당시 영화의 꿈을 갖고 공부를 막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당시 그 영화는 제게 존재자체만으로도 멋있는 영화였다"며 수줍은 팬심을 드러낸 그는 "그 이후 감독님 영화를 줄곧 찾아봤고, 영화 속 대사들도 좋고 감독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들도 정말 좋았다"고 털어놨다.  그가 맡은 장도리는 카리스마 있는 누님 춘자와 진숙 사이에서 찍 소리 한 번 못해보고 막내 노릇에 충실하다 잠시 이들의 사이와 밀수판에 공백이 생기자 엄청난 야망을 드러내며 변모하는 인물이다. 확실히 그 야망이 엄청나고 실상은 사악하기 짝이 없는데,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비주얼과 잔뜩 꾸몄음에도 촌스럽기 그지 없는 뽀글머리와 패션. 그리고 허세와 코믹함으로 가득한 모양새가 쉼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박정민은 "감독님 특유의 뉘앙스, 말 맛 같은 것이 살아있는 캐릭터였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오는 허술함이 있어서 진짜 나쁜 짓을 하면 끝까지는 할 것 같은데 그게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장도리를 소개한다.  나름 '빌런'인 만큼 초반에는 남자다운 모습, 강한 이미지를 부각해야 하나 싶었다.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벌크업을 하는 와중에 그 상태로 피팅을 갔고, 그때 민소매를 입고 있는 제 모습에 감독이 반해 "운동하지 말고 그대로 가자"는 말을 들었고 이에 "감사합니다" 했다는 박정민이다. 그는 "그렇게 외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게 오히려 보는 사람들에게 더 비호감적인 면모를 부각시키지 않았나"라며 웃긴다. 당시 정말 하염없이 먹고 살을 찌웠단다.  그가 탐구한 장도리는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에 어른이 된 인물이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계속 떠돌아 다녔던 사람이고 진숙을 만나 정착을 했지만 이를 온 마음으로 감사하게 여기기엔 이미 글렀을만큼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고 줏대가 없었다고. "순전히 자기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자연적으로 못된 행동을 연속적으로 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자꾸 어긋나고 멍청한 선택들을 하게 되는 거라, 처음부터 '악한 사람'을 연기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는 설명이다.  유독 감독의 세밀한 디렉션을 거친 것이 장도리이기도 했다. 류 감독은 동네 아저씨 A를 떠올릴 수 있는 연기를 해달라 요구했다. 코를 파거나,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 스타일의 말맛을 살리거나, 허술하고 뻔뻔한 모습 등이 다 디렉션에 의한 연기였다. 특히 장도리 혼자 라이벌이라 여기는 권 상사를 대할 때 '되도 않는' 허세로 맞붙는 신은 코믹함의 절정이다. 잔뜩 겁먹은 상태임에도 유리컵을 씹어먹거나, 다리를 꼬고 있다가 이에 대한 지적에 움츠러드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능청&지질 연기의 경지다. 박정민은 이를 두고 "그건 그냥 저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본캐가 지닌 찌질함이 녹아 들어 그런게 아닐까"라고 말하며 웃겼다. 이어 "당시 느낌을 작은 개가 무서워서 쫄지만 계속 으르렁 거리고 언제든지 물 준비를 하면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느낌이라 여겼다"고 찰진 비유로 설명했다. 그렇게 찌질하고 멍청한 장도리의 모습을 부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밀수'의 코믹 축을 확실하게 담당하면서도 또 "대놓고 웃기려 했던 건 아니"라는 그다. 그는 "웃겼다면 다행이지만, 사람들을 웃겨야지 생각했다기보다 그 상황에서 감정의 폭들이 어떻게 더 잘 보여질까, 사람을 대하는 상황적 태도에 대한 변주를 더 위주로 생각했다. 그래서 웃겨야 된단 부담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극 중 춘자는 처음부터 장도리의 본질(?)을 꿰뚫어봤는지 그를 유독 무시하고 경멸한다. 박정민은 "처음에 혜수 선배님이 장도리한테 뭐라 하는 신에서 정말 말도 안 나오고 너무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또 애드립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추가 데미지가 들어와서 더 서럽고 그랬다"며 다시금 웃겼다.  현장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더 효과적인 캐릭터를 만나 또 새로운 연기 맛을 알았단다. "캐릭터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배역을 맡은 배우일 수 있지만, 이 영화의 대본을 가장 많이 보고 전체 그림을 수없이 그려본 사람으로 감독님을 이길 수 없다. 감독님 머릿속에 있는 장면들이 정답에 가까운 확률이다. 저는 시키는대로 연기하며 감독님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내서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제 몫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살아온 경험이 미천하기에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고 알게 됐고 더 유연하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느낌이 갈수록 조금씩 더 드는 것 같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쳐다보지도 않았을 의상을 70년대 느낌으로 소화하며 괜히 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 당시의 음악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으며, 배려와 애정이 넘치는 선배들과 함께 연기해 즐거웠다는 그다.  찬란하고 뜨겁게 빛났던 '동주' 속 몽규, 파격적이고 놀라웠던 '다만악'의 트랜스젠더 등 매 작품 속 박정민은 확실한 각인을 남겼다. 매번 그래왔듯 '밀수'에서 역시 장도리로 또다시 인생 캐릭터를 남겼다. 그럼에도 박정민은 "옛날부터 항상 들어오는 배역이 제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역할들이었다. 시키는대로 해서가 아닐까. 개인적으론 활동한 기간에 비해 뭔가 박정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단점이 될 수도 있고,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저런 역할을 해볼 수 있고 여러 감독님과 해볼 수 있으니 좋은 점이라 여기고 세월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싶다"고 의외의 생각이다.  단언컨데, 단정지을 수 없는 무한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 박정민이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그냥 편견이 없는 배우 같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좋게 말하면 유연한 배우가 되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진=샘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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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공자' 박훈정 감독만의 유니크 [인터뷰]

    박훈정 감독은 뻔한 이야기와 인물을 그만의 방식으로 유니크하게 탈바꿈하는 특출난 재능이 있다. 감독의 신작인 몹시 매력적인 미치광이들의 짜릿한 추격 액션 '귀공자'만 봐도 그 능력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뒷거리 복서 일을 하며 살아가던 코피노 마르코(강태주)를 지독하게 쫓는 미치광이 킬러 통칭 '귀공자'(김선호)와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학 재단 한이사(김강우)의 강렬한 추격전은 짜릿하고, 유니크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박훈정 감독은 애초 '슬픈열대'란 가제가 붙을 만큼 잔혹하고 어두운 서사를 생각했으나, 촬영을 진행하며 톤이 바뀐 최종의 '귀공자'를 완성했다. "원래 시나리오를 쓸 때 무엇에 대해 쓰고, 어떤 분위기를 유지할 것인지 생각하며 제목을 먼저 정해 놓는데 원래 가제는 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럴 바엔 직관적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는 감독의 설명이다.  '슬픈열대'란 가제가 시사했던 메시지는 의외로 깊었다. 영화는 추격 액션의 외피를 띠며 그 이면엔 '코피노'란 차별적 존재들의 반란을 그린다. 감독은 "영화의 소재가 무겁다.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전이다. 이런 사회 문제는 언론이나 다큐에서 많이 봐왔었고,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자로 그리기보단, 이들 나름대로의 삶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반대쪽, 뭔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의 뒤통수를 한 번 세게 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재미'를 추구하고 싶었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귀공자'가 된 것이다. "영화는 즐겁고 재밌게 보되, 보고 난 후 이 소재에 대해 몰랐거나 관심 없던 사람들이 한 번쯤은 더 생각하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목표였던 감독이다.   어린아이처럼 콜라를 마시며 시종일관 싱긋거리면서도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치광이 추격자 귀공자와 무서운 냉혈한이지만 은근히 유머러스한 한이사는, 유독 캐릭터성이 돋보였던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자칫 전형적인 설정을 교묘하게 틀어 비껴가는 캐릭터들 덕분에 예측 불가한 긴장과 흥미가 유발되는 식이다.   이에 감독은 "대체로 제 영화가 이야기 중심이기보단 캐릭터 중심이다. 캐릭터에 변주를 주는 것을 좋아하고 재밌어한다. 장르물이라는 형식적인 틀안에서 이야기가 벗어나긴 힘든데, 캐릭터는 새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범주를 벗어난 인물을 만들려고 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배우에게 연상되는 기존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탈피한 감독의 선구안은 탁월했다. 드라마 속 로맨틱남으로 소비된 김선호가 맑은 눈의 광기를 뿜어내고, 늘 정교하고 흐트러짐 없는 연기를 보이던 김강우가 작정하고 냉혈인임에도 허를 찌르는 유머러스함을 보일 때. 그 반전의 묘미는 놀라울 만큼 신선하고 흥미롭다.  감독은 "사실 제 작품이라 뭐라 얘기하긴 그렇지만, 저도 한이사 캐릭터가 김강우 배우가 연기한 인물들 중 제일 매력적이고 좋았다"며 쑥스럽게 자찬했다. 이어 "배우가 가지고 있는 배우로서의 매력, 능력을 소위 제대로 뽑아 먹었단 생각"이라며 "한이사가 정말 어려운 캐릭터다. 자칫 잘못하면 전형적이고 뻔한 캐릭터가 된다. 김강우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강우 배우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 한이사가 담배를 빼어물 때, '아~ 한이사 이런 캐릭터구나' 했고 그때부터 둘이 폭주하듯 인물을 만들어갔다"는 설명이다.  당시 사생활 논란으로 퍽 시끄러웠던 김선호를 구설수에 휘둘리지 않고 뚝심있게 믿고 간 대목 역시 박훈정 감독의 의리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감독은 김선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배우가 이전에 했던 멜로 연기를 보며 오히려 보고 싶은 귀공자의 모습을 엿봤다. 마지막 액션을 끝내고 난 후 피칠갑을 하고 머리를 쓸어 올리는 장면이 내가 그려왔던 모습이었다. 약간 미치광이고 사이코틱한 인물이다. 애가 제정신은 아니지 않나"라고 웃기며 "그런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는 느낌, 그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뒤틀린 일상성과 변주를 기막히게 포착하는 감독이다. 특히 그가 구축한 견고한 '마녀' 세계관이나 매번 생동감 넘치게 살아 숨쉬고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은 감독의 독보적 창의력과 관찰력의 반증이다. "아이디어가 샘솟는 건 아니"라며 멋쩍어하던 감독은 다만 "저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나 소재들을 접하면 보이는 단면 그 이면의 모습이 궁금했다. 예를 들어 돌멩이의 한쪽 면을 보면 늘 뒤나 옆이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이 모습이 나오기 위해 그 이면엔 어떤 모습이 있었을까 생각했고 그 뒷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면 그 안에 필연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대체로 자기가 보고 겪었던 사람들인데 일상적이거나 전형적이면 심심하고 영화적이지가 않다. 그래서 몇 명의 인물을 섞거나, 이 인물을 일탈시킨다. 제가 봤을 때도 흥미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재밌다"는 감독이다.  이번 작품은 유독 감독이 이전까지 드물게 보여왔던 유머 코드가 전면에 드러나기도 했다. 살벌하고 일촉즉발 긴장감이 도사린 상황에서 생뚱맞게 등장하는 의외의 말맛과 유머코드가 '귀공자'의 재밌는 톤앤매너다. 하지만 감독은 "제가 모든 영화에 유머를 넣는데 사실 그게 안 통한다"고 시무룩하다. 이어 "이전까진 무거운 영화에서 유머 코드가 있어서 잘 안 통했다. 원래 대중적인 유머 코드도 아니라 몇몇만 웃고 좋아하셨는데 그나마 이번엔 통한 게 영화 톤이 예전보단 살아났고, 배우들 역시 이를 잘 살려준 몫이 크다"고 공을 돌렸다.  박훈정 감독은 줄곧 유니크한 액션 스타일을 선보여왔다. '귀공자' 또한 독특하고 강렬한 액션의 기조를 유지한다. 이에 대해 감독은 홍콩 누아르 영화 광팬이었다며 "학창시절에 홍콩 누아르, 일본 애니메이션, 무협영화, 유럽 갱 영화들을 많이 봤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제게 영향을 줬던 장르와 문화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이어 "제 영화는 액션이라기보다는 폭력을 연출한다고 생각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그는 "제가 원래 역사를 좋아하는데 인류의 역사가 사실 폭력의 역사다. 모든 갈등 해결 방법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이 폭력이기도 하다. 이런 모순적인 모습들에 관심이 많고, 작품에도 투영되는 것 같다"며 "그래서 아마도 보시는 분들은 수위가 높고 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상업영화감독으로서 흥행에 대한 부담도 컸지만, 감독은 확고한 연출관이 있다. "흥행에 대한 고민은 늘 크고 성패에 대한 책임은 만든 사람이 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의 가장 큰 의미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얼마나 재밌는지, 그것이 영화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박훈정 감독이 추구하는 것은 영화의 본질적인 '재미'였다. "기본적으로 내가 재밌어하는 영화를 만든다. 제가 안 볼 영화를 남들에게 봐달라고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직까진 제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감독의 소신이다.    사진=스튜디오앤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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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공자' 김선호, 아찔한 '맑눈광'의 잔향 [인터뷰]

    해사한 얼굴과 늘씬한 슈트핏으로 더욱 돋보이는 외모, 종일 싱글거리는 미소까지 '귀공자'란 명칭이 어쩜 이리 맞아떨어진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이 미남자가 웃으며 마구잡이로 살육을 시작할 땐, 그야말로 '맑은 눈의 광인'이 따로 없다. 첫 스크린 주연작에서 확실한 임팩트를 남긴 배우 김선호다.  박훈정 감독의 추격 액션 영화 '귀공자'에서 김선호는 타이틀롤이나 다름없는 귀공자 역을 맡았다. 자칭 프로라 칭하는 남자다. 그는 오프닝 신만으로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확실히 각인시킨다. 포마드 헤어스타일과 말끔한 슈트 차림을 고수하고, 싱글거리며 살인을 하고, 그러다 고급 의상에 피가 튀거나 옷차림이 흐트러지자 질색을 하며 기겁을 한다. 이 정체불명의 미남자는, 극 내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추격자의 모습으로 궁금증을 유발한다. 오싹하면서도 유쾌한 광기(?)가 흐르는, 대단히 미묘하고 본 적 없는 인물을 능청맞게 연기한 김선호다.  평소 박훈정 감독의 팬이었단 그는 "감독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저 팬이에요!!' 했다. '신세계'와 '마녀'의 액션 신들이 정말 신기하고 충격이었다. 감독님께 정말 재밌었다고 하니 '으하하' 웃으시더라"며 "그리고 '귀공자' 얘기를 들었고 대본을 읽었을 때 제게 이런 역할이 들어왔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재밌는 작업일 것 같아 설렜다"는 회상이다. 아무래도 첫 스크린 데뷔라는 긴장감이 작용했지만, 막상 현장에 가니 큰 차이는 없었고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했다고.  '귀공자'는 필리핀에서 병든 어머니와 사는 코피노 마르코가 수술비 마련을 위해 평생 본 적 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한국으로 향하던 중,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세력들로부터 광기의 추격을 당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귀공자는 그 중 하나인 정체불명의 남자다. 그는 홀연히 마르코 앞에 나타나 자신을 친구라 소개하고, 이후 마르코 주위를 맴돌며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적인지, 친구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김선호는 귀공자 배역에 이입하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했다. 귀공자는 늘 신나고 즐거워보인다. 평소에도, 살인을 할 때도 시종일관 웃고 있다. 대본에 '웃으며'란 지문이 특히 많았다. 처음엔 그게 의아하고 이상했단다. "살인을 하면서도 웃고 있고 친구라 부르고, 휘파람도 가끔 불고 이 아이는 돌아이인가 했다"며 웃긴 김선호다. 이어 "콜라를 먹는 신도 대본에 이렇게 쓰여있다. '맛있게도, 어린애처럼 먹는다'. 그걸 보며 진짜 나쁜 걸 모르고 즐기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치구나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감독이 언급한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참고했다. 악행을 벌이면서도 마치 놀이를 하듯 분간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귀공자를 잡아나갔다. 깔끔하고 귀공자적인 외형을 하고 있지만, 원초적으로 접근했을 때 귀공자는 왜 이렇게 깔끔할까? 성격일까? 고민했다. 보육원 출신이고 어렸을 때부터 집단에 속해 킬러 훈련을 받았고 병이 결렸다. 그렇다면 귀공자의 깔끔함은 어떤 결핍에서 나온 게 아닐까? 그럼 좀 더 병적이어도 되겠다 싶어 창고 신에서 더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터널 추격 신 장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외적으로 깔끔하고 정돈된 사람은 뛰는 모습도 다를 것이다. '힘들지만 마르코가 돌아볼 때마다 힘들지 않은 척 한다'는 지문에 더해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기계적으로 뛰면서 더 크게 웃었다는 설명이다. 유독 엄살을 떨며 아파하는 모습도 그에겐 의문이었다. 박훈정 감독은 "아프기 싫어서 먼저 쏘는 애다. 그러니 먼저 한 발 쏴야 한다"고 했다. 더 겁내고 아파하고, 그래서 먼저 행동하고 그렇기에 더 잔인해 보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처음엔 캐릭터가 예측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까? 싶었다. '안녕 친구 반가워'라 말하고 '아 역시 벤츠야'라며 감탄하고 이런 예측 불가능한 아이였는데 저도 감독님 세계관에 빠져들다 보니, 얘는 정말 반갑고 놀듯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아이구나 싶었고 연기하면서 오히려 예측이 안 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고.  이처럼 배우 김선호는 스스로도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한 타당성을 찾아갔고 왜라는 의문 속에 답을 내려갔다. 그렇게 켜켜이 쌓아 나간 탓에 외양부터 사소한 습관과 말투, 행동 등의 디테일함까지 빈틈없고 생동감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 완성됐다. 그동안 본 적 없는 매력적인 킬러 '귀공자'의 탄생이다. 김선호는 이렇듯 꾸준하고 오랜 탐구파 유형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배우로서 제가 좀 느리다. 질문도 많은 편이고 잘 알아듣질 못해서 자꾸 물어본다"며 너스레 섞인 자책이다. "연기라는게 모호하고 사람 인생이 묻어나는 거라 생각한다. 배우로서 욕심이 있어서 왜냐고 자꾸 물어보고, 말하는 사람은 지치고 그렇다. 그래도 한 번 알아듣기 시작하면 정말 확실히 알겠다. 차근차근 캐릭터를 구축해 나간다고 생각한다.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유연하려고 노력하고 꾸준히 빌드업해가고 있다." 기대하던 액션 연기를 원없이 해본 것도 그에겐 설레는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길게 해 보긴 처음이다. 확실히 좋은 액션을 찍으려면 다양한 것을 완벽히 준비해야 하더라. 액션의 합, 변수 등을 미리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감독님이 워낙 원하는 액션이 명확히 있으셨고, 과하거나 선이 넘지 않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설명이다. 그는 초인처럼 보이는 귀공자의 액션 실력에도 "감독님이 '얜 프로야, 프로'라고 하셨다. 저도 인물에 설득력을 갖기 위해 오랜 시간 질문을 하다가 감독님과 '존 윅'을 보러 갔다. 존 윅이 빌딩 끝에서 떨어질 때 살아난다. 그다음은 의심 없이 살아날 거라 생각한다. 연극할 때도 생각났다. 물이 없는데 물을 마시는 장면, 마주 보지 않고 정면을 보고 대화하는 것들. 처음엔 어색한데 보다 보면 몰입이 된다. 감독님의 세계관 속에서 '귀공자'의 액션이 프로 같고, 위트 있고, 깔끔하고 정돈된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계속 유지하면 관객도 설득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귀공자가 굉장히 비현실적인 인물임에도 이처럼 현실성과 생동감을 띠게 된 이유다. 김선호는 "저처럼 매체에 많이 노출된 배우가 갑작스럽게 잔인한 역을 맡으면 초반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텐데, 감독님이 위트 있게 써놓은 지점들, 엉뚱한 코믹 요소들이 좋았고 저로서는 새로운 걸 표현할 수 있어 정말 기쁜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늘 연기는 "절실하다"는 김선호다. 첫 영화인만큼 신기한 경험들을 했고, 그것만으로도 기뻤다고. "이번 작품으로 '김선호가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구나, 가능성이 있네'라고 생각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다"고.  "저처럼 느린 사람이 배우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수많은 선배님들이 쌓아놓은 레퍼런스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국에선 히스 레저의 '조커'가 있었기에 그런 유형의 인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런 도움을 받게 된다. 처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걸 만들고 구현하는 건 배우로서 힘든 작업이다. 저 역시도 언젠가 남들이 하지 않았던 무언가의 레퍼런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배우가 된다면 정말 좋은 배우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느리지만 천천히, 진심으로 연기를 생각하는 배우 김선호의 바람이다.  사진=스튜디오앤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