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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수' 인상 깊다, 조인성 [인터뷰]

    등장만으로 단숨에 시선을 압도한다. 존재만으로 느껴지는 남다른 아우라다. 영화 '밀수' 속 조인성이다.  사업가적인 면모와 악독한 기질로 밀수판을 접수한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 '애꾸눈'의 범상치 않은 부하와 함께 등장한 그는, 훤칠한 외모와는 달리 기사도 정신이나 여성에 대한 매너를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의 기질을 단숨에 드러내며 공포심을 떨친다. 70년대 해녀들의 밀수 이야기를 담은 류승완 감독의 '밀수'에서 인상 깊은 조인성의 첫 등장 신이다.  정작 본인은 "그런 식으로 등장해본 적이 없어 너무 민망했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영화를 봤단다. "제가 강렬하게 보였다면 그만큼 김혜수 선배가 공포심에 덜덜 떨어주고 하니까, 그 리액션이 제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지대한 공로를 했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월남전에서도 사악한 익명을 떨쳤다는 권 상사는 그 아름답고 화려한 미모의 춘자(김혜수)가 살기 위한(?) 필사적 애교를 부려도 거들떠도 안 보고, 심지어 냅다 이마를 칼로 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이처럼 상종하기도 무서운 인물이건만, 의외로 춘자의 계략(?)에 휘말린 뒤 아주 흥미롭고 다채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물론 '멋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이에 "멋있었나? 모르겠다. 멋있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라며 멋쩍어하던 조인성은 류 감독의 연출법 덕분이고 상대 배우 김혜수의 효과라며 모든 공을 돌렸다.  '모가디슈'에 이어 류 감독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춘 그는 "'모가디슈'는 상황을 따라간다면, '밀수'는 인물 위주의 영화고 인물을 따라간다. 그 연출법의 차이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아마 감독님의 의도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길 권 상사는 전국구의 품위가 있다. 동네에서 노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그 품위를 놓지 말라는 것이 감독의 주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꾸 의외성이 나오는 거다. 예를 들면 배 위에서 파도가 출렁댈 때 무너지는 자신만의 표정이 나온다. 그럴 때 약간의 '얼빵함'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폼을 잡고 있는 권 상사의 의외성을 보여주며 자칫 지루하거나 쉬운 역할을 재밌게 완성시킨 것 같다"고 했다.  특히 '없는 듯 있는' 춘자와의 미묘한 감정의 캐치가 은근한 설렘 포인트이기도 하다. 앞전에 등장한 권 상사의 모습만 보면, 저 죽을 다급한 위기에 충분히 여자를 방패막으로 삼을 뻔 한데 또 의외로 제 등 뒤로 보호하고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다. 이때 떼거리 액션과 더불어 권 상사의 '멋'이 제대로 폭발하며 여심까지 저격하는 식이다. 이에 조인성은 "저희가 어떤 관계냐고들 물으시는데 딱히 정해놓은 관계가 아니다. 보시는 분들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규정지을 수 없는 화학적 작용인 것 같다. 멜로가 가능한 남녀가 만나 연기를 했고, 그걸 보시는 분들의 시각이 멜로로 봤다면 멜로이고, 정답이랄 것이 없다"고 했다.    조인성은 권 상사의 쓰임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가족과도 같던 춘자와 진숙(염정아)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화해에 이르는 서사. 그리고 펼쳐지는 본격적인 해양범죄활극에서 권 상사는 '브릿지'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역할이 크고 작고를 떠나,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제가 나온 것에 대해 감독님은 분명한 이유를 주신다. 국면 전환을 하는 캐릭터로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집중했던 것 같다"고.  분명한 건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확실히 존재감을 떨치는 조인성이다. 이젠 손쉽게 노련함을 뽐내는 배우가 됐다. 그는 지난 경험들이 큰 자산이 됐다고 말한다. "경험이 있다는 건 어떤 순간에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경험을 얻는다는 건 그만큼 늙어간단 뜻이기도 하다. 나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이고 이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반면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나이 듬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잘 나이 들어가는 법을 생각하려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말하길 '비열한 거리'의 병두를 지금의 조인성이 했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반대로 지금의 권 상사를 그 당시의 조인성이 했다면 전혀 이같은 느낌을 내지 못했을 거라고. 그렇게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가며 더 행복한 배우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가 예능을 유독 고집하는 이유도 따로 있다. 피치못한 코로나 팬데믹 등을 겪으며 대중과 소통하는 기회가 없었다. 작품으로 만나볼 수 없다면 다른 돌파구를 찾아 대중과 가까이 만나고 싶었다는 것. "어렸을 땐 신비주의란 명목 아래 자신을 지키려 했는데 요즘엔 어떤 식으로든 대중과 만나 소통하고 싶다. 일례로 최근에 '어쩌다 사장'을 찍을 때 동네 할머니께서 광수 손을 붙들고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힘들다던데 힘내라는 말을 하셨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됐다. 이런 인연이 신기하게 생기는 거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을 찾아뵙고 싶고, 이렇게 얼굴 까먹지 않게 인사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조인성의 소박한 진심이다.  뜨겁고 솔직하고 살가운 마음씨를 지닌 그다. 이번 현장도 바쁜 스케줄을 무릅쓰고 달려온 그의 의리 역시 돋보인다. 그럼에도 "현장이 정말 좋았다. 정말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이렇게 좋은 현장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서로 애정과 관심과 배려를 주고받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더 대동단결 되고 서로를 아껴주게 된다. 김혜수, 염정아 선배님의 칭찬을 들을 땐 더 잘하고 싶어서 주눅 들지 않고 더 용기 있게 연기하게 되더라. 저도 한 구석에 껴서 사랑받고 잘 자란 것 같다"며 되려 고마움을 표했다.  "모든 결과는 스코어로 결정되지만, 그 순간은 짧다. 이를 위해 달려온 시간과 과정이 행복했으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완성된 거라 생각한다"는 조인성의 긍정의 힘이다.  사진=아이오케이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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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수' 오랜만에 뻔뻔한 김혜수 [인터뷰]

    오랜만이다. 저급하고 뻔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팜므파탈 김혜수의 발랄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영화 '밀수' 속 캐릭터 이름 조춘자마저도 어쩜 그리 안성맞춤인지. 오래간만에 작품의 무게감과 감성 등을 벗어나 마음껏 활개 치는(?) 그 모습을 보니 퍽 반갑고 흐뭇하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70년대 말, 불법 밀수가 판을 치던 시절 작은 어촌 마을 해녀들이 해양 밀수에 가담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범죄해양활극이다. '70년대 어느 시골 해안가 마을의 해녀들이 밀수를 했다.' 한 소도시 박물관 자료에 기록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시작된 영화. 김혜수는 여기서 놀라운 흥미를 느꼈다. "70년대는 개인적으로 히피 문화, 당시의 패션, 그리고 몰래 듣던 금지곡들과 락 문화 등. 굉장히 흥미로운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해녀가 밀수를 한다는 설정이 놀라웠다. 해녀가 존재하는 나라도 소수이고, 수중에서 이런 활약을 하는 영화도 유일무이했다"는 설명이다.   류 감독은 처음부터 조춘자 역에 김혜수를 떠올렸다. 춘자는 외양과 내면이 모두 흥미로운 인물이다. 해녀로서 물질을 하면서도 승부욕이 발동해 광어를 맨 손으로 잡아 올리는가 하면, 근처에 들어선 공장 폐기물로 오염된 어패류에 동료 해녀들이 낙담하고 있을때 "낮술이나 하라"며 빠르게 좌절을 벗어나고 새로운 살길을 모색한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생존본능이 강하고 영리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과거사는 어린 시절부터 식모 살이를 하다 군천에 흘러들어와 진숙(염정아)을 만나 해녀가 된 설정. 김혜수는 "혈혈단신에 늘 떠돌이로 여기저기 전전하다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상처받고, 또 아무렇지 않게 생존해야 하는 캐릭터"라고 춘자를 설명했다. 그렇기에 억척스럽고 괄괄한 초반 춘자의 모습이 충분히 납득되는 것이다.  해녀들이 불법 밀수에 가담해 제법 큰 돈을 만지고 재미를 보던 것도 잠시, 밀고자에 의해 불시 단속에 휘말리고 이 비극적 소동은 진숙의 아버지와 동생의 목숨을 앗아가고 해녀들의 생계와 삶마저 처참히 무너지게 만든다.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틈을 타 홀로 달아난 조춘자는 이후 서울로 입성해 화려한 치장과 말발로 부잣집 사모님들에 불법 밀수품을 팔며 나름 훤해진 신수를 자랑한다. 이때 춘자가 소화한 다채로운 70년대 패션은 배우 본연의 미와 어우러져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배가한다. 호화로운 볼거리다. "70년대 패션이 정말 재밌다. 남자도 병적일 정도로 꽉 맞는 나팔바지를 입었다"고 웃음을 터뜨린 김혜수는 "군천은 작은 항구 마을이다 보니 70년대 패션, 문화, 트렌드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다. 춘자는 군천을 떠나 서울의 중심 종로에서 고위층을 대상으로 고가의 특수한 사치품을 거래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런 볼거리는 춘자 캐릭터가 적정선에서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화려해진 조춘자는 극 중 꽤 오랫동안 뻔뻔하다. 전국구 밀수왕 권상사(조인성)에 생존 위협을 당하고 기지를 발휘해 다시 군천에 돌아가 새 밀수판을 짜고, 과거 동료들을 다시 끌어들이면서도 그에게 쏟아진 원망과 비난의 시선을 해명하긴커녕 얄밉게 맞선다. 그렇기에 진숙 역의 염정아와 김혜수가 맞붙어 서로 무시무시하게 뺨을 내리치는 신은 살벌하기 그지없고, 이제껏 본 적 없는 묘하고 강렬한 투샷이다. "실제로 그렇게 때리면 큰일난다"고 그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뜬 김혜수는 이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합을 맞추며 진행한 테크니컬 한 연기"라고 뿌듯해한다.    다시 돌아온 춘자가 밀수 판을 대차게 벌이는 과정에서 조금씩 의문스러웠던 그의 행동에 실마리가 풀리고 그 깊은 내면이 드러난다. 참으로 양파같은 여인이다. 김혜수는 이전까지 얄밉게만 보였던 춘자의 서사와 심리를 납득시키고 다시 보듬게 한다. 춘자가 진숙에게 그 어떤 해명과 변명보다 "너 나 모르냐"라고 반복했던 말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춘자에게 진숙은 전부였다. 늘 외톨이, 떠돌이로 전전하던 춘자를 어쩌면 처음으로 따뜻하게 받아준 인물이었을 거다. 진숙이 가진 성정, 배포는 해녀들의 리더로서 손색이 없는 따뜻하고 진중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적인 의리가 있다. 춘자에겐 진숙이 인생 처음으로 따뜻함과 안락함을 준 은인이자 소중한 짝꿍이고 우정 그 이상, 가족이자 전부일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춘자는 확실하게 오해가 풀리기를 기다렸고, '너 나 모르냐'란 말은 정말 제 마음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의심하고 비난해도 너는 진짜 날 알았으면 한단 마음이었다. 그래서 대본 작업하며 감독님께 의견을 많이 드렸고 이를 수렴해 주셔서 적용했다"고.  이렇게 춘자와 진숙의 얽히고설킨 서사는 김혜수와 염정아의 완벽한 호흡으로 완성된다. 김혜수는 이에 대해 "우리 영화는 캐릭터 앙상블이 굉장한 관건이다. 각각의 인물들과 관계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풀리는지, 그 조화에 따라 완성되는 영화였다"고 만족했다.  이윽고 해녀들의 연대(여기에 다방 마담 옥순까지)가 시작될 때 영화는 본격적인 활극을 제대로 벌이며 쾌감을 준다. 이때 펼쳐지는 해녀들의 수중 액션은 짜릿한 볼거리다. 김혜수는 '도둑들' 때 느꼈던 공황 증상으로 인해 물 공포증이 있었지만, 자신이 폐를 끼치면 안 된단 생각에 직접 물속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으면 공황이 온다고 하더라. '도둑들' 당시 저도 몰랐다. 원래 저는 물이 정말 편하고 수영도 할 줄 알지만 그때 공황을 겪고 이번에 다시 오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우리 팀이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팀워크를 느끼며 뭔가 벗어난 느낌을 받았다.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수중에서 진숙과 춘자가 서로를 끌어주며 교차하는 신은 더욱 특별했다. "대본을 볼 때부터 떠오른 이미지가 뭉클했다"는 김혜수는 "우직한 관계의 힘이 느껴졌다. 물 속이라는 건 우리에겐 생업의 장소이지만 생존을 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잖나. 두 사람이 서로가 밀고 당겨주는 관계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수경이 장비에 부딪혀 깨지며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처음 경험하고 도전하는 수중 장면들이 의미 깊었단 김혜수다. 그는 "저도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물 속에서 숨을 참고 말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연대감이 정말 새롭고 특별했다"며 "모든 배우들, 스태프들, 그리고 물 밑에서 저희 안전을 책임지신 잠수사 분들, 모두가 함께 해낸 영화다. 작업하며 종종 작업일지를 쓰는데 정말 소중하고 좋았던 순간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 '밀수' 때 정말 많이 썼더라. 우리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 정말 뜨거웠다"고 회상했다. 매 작품을 시작하기 전 정체성을 고민한단 그다. 초심을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일을 하는 나는 뭔가." 이번 작품에서 그는 끈끈한 결속력을 지닌 팀을 만났고, 자신은 그 팀원으로서 누를 끼치지 않고 맡은 일을 잘 해내겠단 생각으로 임한다고. 누구나 믿고 인정하는 대배우 김혜수의 겸손하고 바람직한 연기관이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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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수' 염정아의 걸크러쉬 [인터뷰]

    염정아의 필모그래피는 다채롭다. 농염하고 도회적이고, 때론 아름답고 히스테릭하기도 했다가, 의외로 철없고 푼수 같은 모습도 보여주고, 더없이 리얼한 생계형 소시민의 이미지도 담아낸다. 폭넓고 한계가 없다. 그가 또다시 새롭게 담아낸 이미지는 조용하고 묵직한 걸크러쉬다.  70년대 작은 어촌 마을 해녀들이 밀수판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에서 염정아는 평생 물질만 하다 생계를 위해 밀수판에 가담한 해녀들의 리더 엄진숙 역을 맡았다. 류 감독은 염정아가 영화 기획 때부터 엄진숙 역으로 함께 하고 싶은 유일한 배우였다고 했다. "류승완 감독님 영화에, 이렇게 재미있는 소재에, 김혜수 언니와 같이 하는 작품인데 당연히 안 할 이유가 없었다"는 염정아다.  진숙은 염정아에게서 지금껏 보지 못한 또 다른 모습이다. 진숙은 어린 시절부터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바다를 놀이터 삼아 커왔고, 동녀 해녀들을 다부지게 지켜온 해녀다. 그리고 식모 살이를 전전하다 흘러들어온 춘자(김혜수) 또한 따뜻한 성품으로 품어준 인물이다. 하지만 비극적 사고를 겪고 그럼에도 해녀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을 다잡는다. 묵묵하고 조용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진숙이다. 염정아는 "튀는 캐릭터들이 많은데 진숙은 혼자 진중하게 눌러줘야 하는 인물이라 배우로서 혼자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표현을 많이 하는 인물이면 감정도 세게 표출하면 되는데 그게 아닌 인물이다보니 혼자만의 고민이 시작된 것"이라고 덧붙인 그는 "제가 진숙 같은 역할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저도 약간 튀는 역할을 하거나 센 역할을 해봤지, 이처럼 묵직하게 자기감정을 쭉 밀고 나가는 역할은 별로 안 해봐서 많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진숙과 연상되는 키워드를 떠올렸다. 제일 먼저 리더가 떠올랐다. 어깨에 책임감을 잔뜩 얹은 리더. 염정아가 말하길 진숙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선장이고 배가 있었기에 다른 해녀들의 가족과 생계를 책임지는 모습을 봐왔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생활이었기에 커서도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걱정하는 인물이라고.  그런 진숙이 밀수판에 가담했다가 결국 비극적 사고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는다. 이때 염정아가 모든 기력이 빠진 듯 탈진한 채 쓰러져 슬픔을 억누르는 신은 특히 인상깊다. 염정아는 "그날 죽는 줄 알았다"며 "정말 너무 슬펐다. 극 중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그걸 배 위에서 보는데 정말 눈물이 하염없이 났다. 같이 있던 해녀들 모두 엉엉 울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로 인해 춘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만, 진숙은 원망을 조용히 억누른다. 삶의 회한에 휩싸이고 좌절하기보다, 아직 책임져야 할 해녀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기에 수모를 묵묵히 견디며 고요히 분노한다. 감정의 진폭을 미동 없이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연기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의 깊이 속에 촘촘한 밀도가 느껴지니, 새삼 염정아의 연기 내공에 감탄한다. 염정아는 극 중 BGM이 한몫했다고 겸손이다. "모든 노래들이 대본에 쓰여있어서, 해당 신을 읽을 때 미리 노래를 들으며 도움을 받았다. 특히 김추자의 '무인도'가 정말 좋았다. 진숙이 아빠와 동생을 잃고, 춘자도 도망치고 혼자 감옥에 들어갔을 때 전주부터 쫙 깔리는 것이 '무인도'다. 마치 진숙의 테마곡 같단 생각이 들었다."     춘자를 향한 애증이 터지는 장면은 관객에도 진숙에도 짜릿하고 강렬한 신이다. 이어 둘의 오해가 풀리는 신은 애틋하고 후련하다. 염정아는 "객관적으로 봤을 땐 진숙도 불쌍하고 춘자도 불쌍했다. 그래서 둘의 오해가 풀리는 신이 우리에겐 정말 중요한 장면이었고 혜수 언니도 저도 정말 진지하게 둘다 진짜 춘자와 진숙이 된 것처럼 진심을 많이 담아 연기했다"며 "또 혜수 언니와 함께 극 중 두 사람의 관계를 계속 이야기하며 같이 신을 만들었다. 원래 시나리오보다 짧고 굵게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당시 류 감독은 해당 신을 보며 '내가 이 두배우가 이렇게 연기하는 걸 가장 가까이서 처음 본 관객이라니'라고 얘기했단다. 염정아는 이를 두고 "배우로선 최고의 찬사"라고 감격했다.  또 함께 연기한 김혜수의 모든 것에 감탄하며 애정과 찬사를 호들갑스럽게 늘어놓기도 했다. "저는 옛날부터 혜수 언니가 엄청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90년대 중반 쯤에 잠깐 드라마를 같이 한 적 있다. 그때도 그 언니는 멋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거침없었고 저보다 두 살이 많은데 많이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진짜 혜수 언니는 워낙 사랑이 많고 하루에도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해주시는 줄 모른다. '언니 그만해!!'라고 할 정도다. 계속 상대의 장점을 예쁘게 말해주고, 선물도 많이 해주고, 현장에는 늘 언니가 집에서 가져온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집에서 과일 씻어오고 간식을 담아 오고 언제든지 꺼내 먹으라고. 정말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특히 두려웠던 수중 신도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며 "모든 스태프들은 물 위에 있고 물 안에는 혜수 언니와 저 둘밖에 없다. 큐 사인을 감독님이 주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하는 거라, 언니와 제가 눈을 맞추고 서로의 상황을 보며 셋을 셀 때. 세상에 마치 둘밖에 없는 그 순간의 느낌이 있다. 진짜 눈물나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밖에도 해녀들, 그리고 옥분 역의 고민시까지 함께 하며 대기실이 늘 시끌벅적했고, 마치 다시 여중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운 현장이었다는 설명이다. "같이 환호하고 소리지르고 웃고 우는 현장"에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재밌고 마음이 든든함"을 느꼈다고, "언제 다시 이런 현장을 만날 수 있을까" 하며 소중한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는 그다.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각자 매력이 있는 캐릭터들이 잘 어우러져서 표현이 잘 된 영화"라고 '밀수'에 대한 애정 어린 자부심을 표현한 염정아는 "제 필모에 가장 흥행이 많이 된 작품으로 남고 싶다"고 은근한 바람을 내비쳤다.  다양한 작품 속 다채로운 모습을 담아왔던 배우 염정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연상하는 키워드를 "성실함"이라고 꼽았다. "사실 배우로서 자부심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칭찬받으면 좋고, 아닌 반응을 보면 슬프다. 다만, 저는 배우로서 성실하게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는 착실한 대배우 염정아다.  사진=아티스트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