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오랜만에 뻔뻔한 김혜수 [인터뷰]
오랜만이다. 저급하고 뻔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팜므파탈 김혜수의 발랄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영화 '밀수' 속 캐릭터 이름 조춘자마저도 어쩜 그리 안성맞춤인지. 오래간만에 작품의 무게감과 감성 등을 벗어나 마음껏 활개 치는(?) 그 모습을 보니 퍽 반갑고 흐뭇하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70년대 말, 불법 밀수가 판을 치던 시절 작은 어촌 마을 해녀들이 해양 밀수에 가담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범죄해양활극이다. '70년대 어느 시골 해안가 마을의 해녀들이 밀수를 했다.' 한 소도시 박물관 자료에 기록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시작된 영화. 김혜수는 여기서 놀라운 흥미를 느꼈다. "70년대는 개인적으로 히피 문화, 당시의 패션, 그리고 몰래 듣던 금지곡들과 락 문화 등. 굉장히 흥미로운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해녀가 밀수를 한다는 설정이 놀라웠다. 해녀가 존재하는 나라도 소수이고, 수중에서 이런 활약을 하는 영화도 유일무이했다"는 설명이다.
류 감독은 처음부터 조춘자 역에 김혜수를 떠올렸다. 춘자는 외양과 내면이 모두 흥미로운 인물이다. 해녀로서 물질을 하면서도 승부욕이 발동해 광어를 맨 손으로 잡아 올리는가 하면, 근처에 들어선 공장 폐기물로 오염된 어패류에 동료 해녀들이 낙담하고 있을때 "낮술이나 하라"며 빠르게 좌절을 벗어나고 새로운 살길을 모색한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생존본능이 강하고 영리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과거사는 어린 시절부터 식모 살이를 하다 군천에 흘러들어와 진숙(염정아)을 만나 해녀가 된 설정. 김혜수는 "혈혈단신에 늘 떠돌이로 여기저기 전전하다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상처받고, 또 아무렇지 않게 생존해야 하는 캐릭터"라고 춘자를 설명했다. 그렇기에 억척스럽고 괄괄한 초반 춘자의 모습이 충분히 납득되는 것이다.
해녀들이 불법 밀수에 가담해 제법 큰 돈을 만지고 재미를 보던 것도 잠시, 밀고자에 의해 불시 단속에 휘말리고 이 비극적 소동은 진숙의 아버지와 동생의 목숨을 앗아가고 해녀들의 생계와 삶마저 처참히 무너지게 만든다.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틈을 타 홀로 달아난 조춘자는 이후 서울로 입성해 화려한 치장과 말발로 부잣집 사모님들에 불법 밀수품을 팔며 나름 훤해진 신수를 자랑한다. 이때 춘자가 소화한 다채로운 70년대 패션은 배우 본연의 미와 어우러져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배가한다. 호화로운 볼거리다. "70년대 패션이 정말 재밌다. 남자도 병적일 정도로 꽉 맞는 나팔바지를 입었다"고 웃음을 터뜨린 김혜수는 "군천은 작은 항구 마을이다 보니 70년대 패션, 문화, 트렌드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다. 춘자는 군천을 떠나 서울의 중심 종로에서 고위층을 대상으로 고가의 특수한 사치품을 거래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런 볼거리는 춘자 캐릭터가 적정선에서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화려해진 조춘자는 극 중 꽤 오랫동안 뻔뻔하다. 전국구 밀수왕 권상사(조인성)에 생존 위협을 당하고 기지를 발휘해 다시 군천에 돌아가 새 밀수판을 짜고, 과거 동료들을 다시 끌어들이면서도 그에게 쏟아진 원망과 비난의 시선을 해명하긴커녕 얄밉게 맞선다. 그렇기에 진숙 역의 염정아와 김혜수가 맞붙어 서로 무시무시하게 뺨을 내리치는 신은 살벌하기 그지없고, 이제껏 본 적 없는 묘하고 강렬한 투샷이다. "실제로 그렇게 때리면 큰일난다"고 그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뜬 김혜수는 이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합을 맞추며 진행한 테크니컬 한 연기"라고 뿌듯해한다.
다시 돌아온 춘자가 밀수 판을 대차게 벌이는 과정에서 조금씩 의문스러웠던 그의 행동에 실마리가 풀리고 그 깊은 내면이 드러난다. 참으로 양파같은 여인이다. 김혜수는 이전까지 얄밉게만 보였던 춘자의 서사와 심리를 납득시키고 다시 보듬게 한다. 춘자가 진숙에게 그 어떤 해명과 변명보다 "너 나 모르냐"라고 반복했던 말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춘자에게 진숙은 전부였다. 늘 외톨이, 떠돌이로 전전하던 춘자를 어쩌면 처음으로 따뜻하게 받아준 인물이었을 거다. 진숙이 가진 성정, 배포는 해녀들의 리더로서 손색이 없는 따뜻하고 진중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적인 의리가 있다. 춘자에겐 진숙이 인생 처음으로 따뜻함과 안락함을 준 은인이자 소중한 짝꿍이고 우정 그 이상, 가족이자 전부일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춘자는 확실하게 오해가 풀리기를 기다렸고, '너 나 모르냐'란 말은 정말 제 마음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의심하고 비난해도 너는 진짜 날 알았으면 한단 마음이었다. 그래서 대본 작업하며 감독님께 의견을 많이 드렸고 이를 수렴해 주셔서 적용했다"고.
이렇게 춘자와 진숙의 얽히고설킨 서사는 김혜수와 염정아의 완벽한 호흡으로 완성된다. 김혜수는 이에 대해 "우리 영화는 캐릭터 앙상블이 굉장한 관건이다. 각각의 인물들과 관계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풀리는지, 그 조화에 따라 완성되는 영화였다"고 만족했다.
이윽고 해녀들의 연대(여기에 다방 마담 옥순까지)가 시작될 때 영화는 본격적인 활극을 제대로 벌이며 쾌감을 준다. 이때 펼쳐지는 해녀들의 수중 액션은 짜릿한 볼거리다. 김혜수는 '도둑들' 때 느꼈던 공황 증상으로 인해 물 공포증이 있었지만, 자신이 폐를 끼치면 안 된단 생각에 직접 물속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으면 공황이 온다고 하더라. '도둑들' 당시 저도 몰랐다. 원래 저는 물이 정말 편하고 수영도 할 줄 알지만 그때 공황을 겪고 이번에 다시 오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우리 팀이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팀워크를 느끼며 뭔가 벗어난 느낌을 받았다.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수중에서 진숙과 춘자가 서로를 끌어주며 교차하는 신은 더욱 특별했다. "대본을 볼 때부터 떠오른 이미지가 뭉클했다"는 김혜수는 "우직한 관계의 힘이 느껴졌다. 물 속이라는 건 우리에겐 생업의 장소이지만 생존을 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잖나. 두 사람이 서로가 밀고 당겨주는 관계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수경이 장비에 부딪혀 깨지며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처음 경험하고 도전하는 수중 장면들이 의미 깊었단 김혜수다. 그는 "저도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물 속에서 숨을 참고 말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연대감이 정말 새롭고 특별했다"며 "모든 배우들, 스태프들, 그리고 물 밑에서 저희 안전을 책임지신 잠수사 분들, 모두가 함께 해낸 영화다. 작업하며 종종 작업일지를 쓰는데 정말 소중하고 좋았던 순간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 '밀수' 때 정말 많이 썼더라. 우리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 정말 뜨거웠다"고 회상했다. 매 작품을 시작하기 전 정체성을 고민한단 그다. 초심을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일을 하는 나는 뭔가." 이번 작품에서 그는 끈끈한 결속력을 지닌 팀을 만났고, 자신은 그 팀원으로서 누를 끼치지 않고 맡은 일을 잘 해내겠단 생각으로 임한다고. 누구나 믿고 인정하는 대배우 김혜수의 겸손하고 바람직한 연기관이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