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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 영화를 향한 뜨겁고 찬란한 러브레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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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3-09-2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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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치기 일보 직전의 영화 촬영장. 그곳에서 걸작에 심취한 감독, 바뀐 대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못마땅한 제작자와 서슬 퍼런 검열 당국 감시자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촌극. 이를 통해 영화에 대한 순수와 낭만, 그리고 열정과 광기를 유쾌하게 그려낸 김지운 감독이다. 감독의 새롭고 실험적인 신작 '거미집'은 그의 진심 어린 자화상이자 영화에 보내는 뜨거운 러브레터다. 


성공적이었던 데뷔작 이후 싸구려 치정극만 찍는단 평단의 가혹한 악평과 조롱에 시달리며, 데뷔작마저 스승 신감독의 유작 아니느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김열(송강호) 감독. 그는 이미 신작 '거미집' 촬영을 끝냈음에도 며칠째 꿈 속에서 완전히 새롭고 파격적인 영화의 결말을 보며 영감과 충동에 휩싸인다. 그대로만 찍으면 틀림없이 걸작이 될 거란 근거 없는 확신에 사로잡혀 촬영을 강행하지만, 바뀐 대본은 지나치게 신여성주의적인 막장극이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대, 당연히 심의를 통과할 리 없다. 제작자 백 회장(장영남)도 극구 반대하고 제작사 후계자 신미도(전여빈)만이 김열의 천재성을 이해하며 그를 적극 지지한다. 김열은 배우들을 불러 모아 촬영을 강행하지만, 스케줄 꼬인 배우들은 불만투성이고 설상가상 검열 담당자까지 들이닥치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거미집'은 독특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소재다. 과연 영화가 될까 싶은, 영화 제작 현장의 혼돈과 광기를 담은, 말 그대로 그 자체가 소재인 영화다. 


'조용한 가족'부터 '반칙왕' '장화홍련' '달콤한 인생' '놈놈놈' 등, 늘 전형적 구조를 탈피한 작품을 도모하던 김지운 감독의 가장 새롭고 실험적인 영화다. 그렇기에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영화의 이해를 돕는 중요한 과정이다.  

김지운 감독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극렬한 변화가 생긴 영화 산업에서, 영화의 의미와 영화를 만드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뇌했다. 어쩌면 이대로 영화가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단 불안감도 느꼈다. 근본적이고 통렬한 질문 끝에 내놓은 영화가 바로 '거미집'이다. 


그렇기에 '거미집'이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것부터 매우 의미깊고 상징적이다.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면 무자비한 검열이 자행되던 절대적인 독재의 시대. 하지만 이 같은 억압과 물리적 탄압에도 영화는, 그리고 예술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창작자들의 예술혼은 더 찬란하고 뜨거웠으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고 일깨우는 역사적, 사회적 지표로서 기능했다. 그런 영화의 존재 가치를 현시점 '거미집'을 통해 깊이 있게 되새기고자하는 김지운 감독이다. 


극 중 김열은 걸작을 만들겠다는 욕망에 심취해 홀로 웃기고 슬픈 분투를 벌인다. 김지운 감독의, 어쩌면 모든 창작자들의 삶과 고뇌를 투영한 듯한 캐릭터다. 김열이 그저 중얼거리는 대사들도 꽤 뼈 때리고 의미심장하다. 이를테면 평론가들의 비아냥에 분노한 김열이 정작 당당히 대응하지 못하고 속으로 '평론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 자들의 예술에 대한 복수다'라고 중얼거리며 정신 승리(?)를 하는 모습이다. 진지하게 영화 댓글과 별점 평을 남겨본 이들이라면 웃기면서 뜨끔할 테다. 바뀐 대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꼬인 스케줄 때문에 불만을 토하는 배우에게 "이게 나만 좋자고 이래?"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모습도 접해본 적 없는 촬영장의 모습이지만, 희한하게 공감될 만큼 그럴싸하다. 그만큼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촬영 현장과 그곳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담아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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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김열 감독이 그토록 열망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내용이 촬영 현장 흐름과 맞물려 흑백 유성영화로 펼쳐진다. 이 엄청난 파격 막장극 속에 숨겨진 의미 또한 흥미롭다. 이 극중극은 70년대 당시로선 기함할만한 신여성주의적 사고관을 지닌 복수 호러극이다. 독재 권력이 집권해 철저히 검열된 계몽영화로 이성교제와 결혼관까지 강요하고 주입하던 시절, 김열은 이에 반하는 담대한 사고관을 담아냈으니 이 얼마나 통쾌하고 짜릿한 불온함인가. 


이처럼 영화는 극중극을 오가며 당시 시대상을 교묘히 반영하는 것은 물론 서스펜스와 정치, 유머, 풍자가 절묘하게 버무러진 혼합적이고 이색적인 멀티극의 재미를 극대화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창작자로서 감독이 직면한 근원적 고뇌는 자칫 영화인에게 국한된 전유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갈수록 난장판이 되는 상황 속에 점점 확신이 사라지고 자기모멸과 불안, 강박에 시달리는 김열 감독의 내면과 마주한 순간, 모든 관객은 아마도 동질감을 느낄 듯하다. 살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 그 불안과 좌절감 등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기에 김열이 스승 신 감독의 환영을 보고 위로받는 시퀀스는 단순히 특별 출연 정우성의 등장이란 독특하고 반가운 장면을 넘어, 관객에도 "자신을 믿으라"는 든든한 격려와 뭉클한 위로를 느끼게 한다.   


'거미집'은 좌절과 열등감, 이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안간힘을 쓰지만 우스꽝스러운 김열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모두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다. 마침내 촬영을 끝내고 홀로 빈세트장을 바라보는 김열의 모습, 그리고 완성된 영화 시사회장에서 화려한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 김지운 감독은 이 묘하게 명암이 교차하는 신의 대비를 그리며 그가 간직한 영화와 인생에 대한 낭만과 바람을 담아낸다. 인생이 늘 온갖 아이러니와 고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듯, 영화 역시 계속되리라는 조심스러운 낙관과 희망을 전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인생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퇴색되는 영화의 존재가치와 상징성을 또렷이 일깨운다. 새삼 감독의 역량이 놀랍다. 다만 대중적이고 익숙한 문법은 아니라 쉬이 받아들이긴 어렵다. 꽤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하지만 곰곰이 의미를 곱씹다 보면 세상 가장 유쾌하고 낭만적인, 찬란하고 뜨거운 애정이 격하게 일렁이는 단 하나의 러브레터를 보게 되리라 장담한다.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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