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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멋들어진 '킹메이커', 정치 영화의 미학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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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2-01-2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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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감각적이고 멋스러운 정치 선거 드라마는 보기 드물다. 변성현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쉬함이 묻어나는 영화 '킹메이커'는 세련된 볼거리는 물론 대의와 명분에 대한 진지한 고찰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여러모로 수작이다. 


닭장 속 달걀이 없어진다. 범인으로 의심가는 자가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약방을 운영하는 서창대(이선균)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 농부의 질문이다. 다소 생뚱맞을 수 있는 영화의 오프닝이지만, 사실 이는 극 전체를 관통하고 종국엔 큰 여운을 남기는 핵심 질문이다. 


서창대는 이북 출신이지만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그는 들끓는 꿈과 야망이 있지만 태생적 한계로 표출할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우연히 거리에서 연설을 하는 정치인 김운범(설경구)을 만난다. 빨갱이란 매도와 야유가 쏟아져도 김운범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억울하고 무서운 이념 전쟁의 산물을 끊어내고자 하는 김운범에게 서창대는 강하게 매료된다. 무작정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급기야 선거 사무실을 찾아간다. 


"옛날에 그리스 살던 아리스토텔레스란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수다. 정의가 바로 사회의 질서다." "플라톤은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었죠.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 스승입니다." 김운범이 말하고, 서창대가 받아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극명히 다른 가치관을 지닌 두 인물의 모습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와 이상향은 같다. 서창대는 제 이상의 발현을 이뤄줄 김운범에게 제 모든 것을 건다. 그의 승리가 곧 자신의 승리인 셈이다. 그렇기에 번번이 낙선하고 열세에 몰린 김운범을 제 방식대로 끌어올린다. 때론 기발함을 넘어 비겁하다 싶을 정도의 선거 전략일지라도 '승리'를 위해선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이를테면 상대편 공화당 선거원들이 유권자들에 줬던 고가의 물품을 공화당 인척 옷을 바꿔 입고 찾아가 다시 뺏은 뒤, 신민당의 이름으로 재배포한다. 속이고 이용하고,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으나 같은 편들조차 질색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한국 정치사의 어두운 단면, 뇌물 공작과 네거티브를 그려내는데도 유쾌한 템포가 재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 서창대의 비겁한 꼼수로 인해 역공을 당했을 때, 자신만의 올곧은 신념으로 이를 해결하며 호소력 짙은 연설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김운범의 대비까지 완벽하다. 


영화는 계속해서 두 사람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며 갈등을 암시한다. 동시에 관객에게조차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오직 정직함과 진심으로만 승부수를 거는 김운범의 우직함은 때론 답답할만큼 고지식하고 미련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반면 서창대의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지략은 통했을 땐 유쾌하고 즐거우나 실패했을 시 위험 요소가 너무도 크다. 또한 아군일 땐 반갑고 든든한 천군만마가 따로 없으나 적군일 땐 무섭고 야비한 이가 서창대다. "세상을 바꾸려면 우선 이겨야 한다"는 서창대와 "어떻게가 아니라 왜 이겨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법"이라는 김운범의 갈등처럼 관객도 성공과 방법론에 있어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게 되는 식이다. 


이처럼 영리하게 딜레마적 상황을 던져놓고 끊임없이 질문과 고민에 빠지게 하는 변성현 감독의 노림수란. 영 탁월하기 이를데 없다. 6~70년대를 고스란히 재현한 디테일한 소품과 의상, 세트 역시 볼거리다. 시대에 맞는 필터감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스타일리쉬한 의상들도 시각적인 즐거움이다. 정치 드라마가 이렇게 우아하고 세련될 수 있나 싶을 만큼, 감각 하나는 타고났다. 특히 신민당 내 대선 후보 지명 대회 장면은 긴박하면서도 고조감이 고취되는,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화려한 축제의 장과도 같으면서 이면으론 치열한 두뇌 싸움과 비밀스럽고 위험한 전략이 오가는 긴장감을 배가하는 흥미로운 건물 구조. 여기에 김운범, 서창대가 가장 극렬하게 대비를 이룰 것을 암시하는 빛과 그림자의 조명까지 완벽하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선거 전쟁, 독재 정권의 공포를 비롯해 그 시절의 소소한 향수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킹메이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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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맞이하게 된 김운범과 서창대의 모습은 그동안 쌓아놓은 서사와 맞물려 애처롭고 씁쓸하기까지 하다. 후반부는 계속 쓴맛의 연속이다. "정의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는 말의 공포를 실감케하는 군부독재를 맞이한 시대적 비극,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정치사의 고질적인 폐해인 지역감정 발현까지. 실존했던 비극의 정치사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이 모든 세월을 아우른 뒤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의 재회는 아련한 판타지 같기도 하다. 어느 멜로 서사 못지않은 애틋한 재회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란 그리운 이의 목소리는 뭉클하고 깊은 감동을 안긴다. 또한 초반의 '닭장 도둑'에 대한 김운범의 해답에 비로소 미소를 짓는 서창대의 모습은 실로 그 여운이 진하다.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만큼 각 인물들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것이 영화의 또다른 재미다. 설경구는 올곧은 신념을 지닌 우직한 정치인의 모습으로도 특유의 '섹시미'를 발산한다. '불한당' 변성현 감독과의 재회로 더욱 깊어진 '멋스러움'이다. 특히 그가 목포 연설신에서 보여준 간절한 호소와 붉어진 눈시울은 아마도 잊지 못할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선균은 빛을 향한 동경과 순수, 그러나 그림자에 짓눌린 욕망과 열등감까지 섬세하고 예민하게 담아낸다. 러닝타임 123분.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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