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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불온하고 찬란한 아나키스트 연인이여, 살아 숨 쉬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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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0-01-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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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포스터
 

비극과 야만의 시대, 장렬하게 불타오른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와 그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일본 여인이 있다. 잔학하고 파렴치한 제국주의 침략시대 지배자들에 맞서 강렬하게 저항했고, 서로의 신념을 확인하며 뜨겁게 사랑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역사속에 잊힌 이 아름다운 불량 청춘들을 충만한 생명감으로 스크린에 되살린 이준익 감독의 12번째 영화 '박열'. 여기엔 난만히 쏟아지는 찬란한 빛과 극렬하게 일렁이는 뭉클한 애수가 공명했다.


영화 '박열'(감독 이준익·제작 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은 1923년 도쿄, 6천 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의 믿기 힘든 실화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후미코가 박열의 시 '개새끼'를 낭독하며 시작된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20년대 도쿄의 전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읊어지는 이 시는 구절구절마다 호기롭고 펄떡이는 생명력이 넘친다. 이처럼 꺼드럭거리며 뽐내면서도 씩씩하고 호방한, 이 유쾌하고 당찬 기개는 이 젊은 '괴짜' 연인들의 맹렬한 아나키즘 정신을 담고있으며 이는 곧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거렁뱅이 차림의 인력거꾼 박열을 보고도 눈을 빛내며 "동거합시다"를 제안하는 엉뚱하고 과감한 여인 후미코와, 그런 후미코에 귀여운 허세를 부리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의 박열은 풋풋하기 짝이 없다. 이어 두 사람은 결합하고 불령선인들과 사상적, 동지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뜻을 함께 한다.


이 과정에서 폭탄 입수 지시를 밝히지 않은 박열에 동지 의식을 잊었느냐며 대차게 뺨을 때리는 후미코, 독립운동 자금을 가로챈 반민족행위자나 사회주의를 매도하는 부당세력을 경쾌하게 응징하는 불령사 단원들, '조센징과 빨갱이가 작당 모의를 한다'며 시비거는 철지난 일본 사무라이에 펄펄 끓는 어묵 국통을 붓는 후미코와 식칼을 휘두르는 박열까지. 통쾌하고 거침없는 이들의 행위가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처럼 영화는 암울한 비극의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비장하고 엄숙하기보다 익살스럽고 통쾌한 기조를 이어간다. 일제 시대를 다룬 영화들은 대체로 일정한 교조적 관점이나 이분법적 사고가 존재하는데 '박열'은 그 틀을 벗어난 점이 묘하게 낯설고 신선하다. 일례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지적 유대로 결속돼 인간의 자유와 평등, 민권을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는 불령사만 봐도 그렇다. 이들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이상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대담하고 패기 넘치는 청춘의 단면을 나타낸다.


이어 일본 내각이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무마시키기 위해 조선인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를 은폐하고자 박열을 희생양으로 삼는데, 그런 박열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 후미코가 제발로 감옥에 들어가며 영화는 본격적인 판을 벌인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믿기 힘든'이란 수식어가 붙는 건 바로 이 지점부터다.


이 '괴짜' 연인들은 오히려 일왕 부자 폭살을 꿈꿨노라 당당히 선포할 뿐더러, 이 재판 과정을 철저히 이용해 침략시대 지배자들의 야만성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장으로 활용한다. 아무리 일본 제국이 갖은 회유와 협박을 해도 요지부동인데다, 도리어 청산유수적 달변을 늘어놓는 이들에겐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결국 속수무책으로 농락 당하는 일본 내각의 모습엔 익살과 해학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한편으론 뭉클한 애수가 배어나온다.


감옥에서도 일본의 천황제와 제국주의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내용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신념과 사랑을 확인하는 박열과 후미코는, 그 어떤 억압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성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이를 끝까지 잃지 않고자 목숨과 맞바꾼 투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대법정에서 맹렬히 불타오른 그들이다.


이때 두 사람이 보여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투쟁 방식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 어떤 대규모 투쟁이나 웅장한 액션 없이도 벅차고 고조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 이는 이들의 아나키즘에 내재된 통렬한 저항 정신만으로 제국주의적 야욕을 분쇄하는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실제 사형 선고를 받고도 환하게 웃으며 "만세"를 외치고,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며 호기롭게 외치는 이들의 모습은 당시 수많은 일본인들을 감화시켰고, 억압과 야만의 시대를 살던 조선인들엔 뜨거운 희망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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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박열'은 부당한 시대에 맞서 뜨겁게 저항했지만,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의 숭고한 삶과 존재 가치를 되짚고자 한다. 이준익 감독은 이 매력적인 괴짜 '연인'들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인물을 통해 당시의 시대와 숨결을 담아낸다. 특히 섬세하고 이성적인 '박열'의 톤앤매너를 살리면서도 당대의 낭만을 가득 담아낸 OST의 여운이 상당하다. 감옥에서 불령사 단원들이 꺾이지 않는 투지를 담아 부른 저항의 노래 '인터내셔널가'는 물론, 아나키스트 연인들의 동지애와 사랑을 강렬하고 우아한 낭만으로 표현해낸 '이태리의 정원'은 극 전반에 걸쳐 수많은 변주를 거듭해 드리워진다. 이는 비극과 낭만이 일렁이는 여운을 감돌게 하며, 그들의 혁명을 완성하는 효과적 장치로 피날레를 맞는다.


그 속에서 이제훈과 최희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아나키스트 연인, 박열과 후미코의 형체로서 실재한다. 1920년대.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의 삶과 사고방식, 신념, 그리고 사소한 제스처와 눈빛, 고통과 희열까지도 무수히 많은 감정의 동화 작용을 이뤄낸 탓이다. 들끓는 생명감으로 넘쳐 흐르는 '박열'의 아름다운 역동성을 찬미해도 좋다.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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