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이하늬, 우아한 절제와 발산 [인터뷰]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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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이하늬, 우아한 절제와 발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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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3-01-1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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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면서도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인물의 황홀한 몸짓에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다. 고도로 절제된 감정 이면엔 뜨겁게 일렁이는 애수가 넘치고, 기품 있는 동작으로 세련된 액션 쾌감을 선사한다. 차갑고도 뜨겁던 비극의 시대 속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 속 이하늬다.  


1933년, 일제강점기 시대 경성. 조선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 버건디 코트와 재킷, 롱 스커트, 워커 차림의 꼿꼿한 자세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 뛰어난 재력가 집안의 자제답다. 하지만 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여인의 절제된 눈빛에는 언뜻 번뜻 미세하게 드러나는 아픔이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심어진 항일조직 흑색단 단원 '유령'으로 의심되는 첫 번째 용의자다. 


이하늬가 맡은 차경은 극의 처음부터 '유령'임을 명시하는 캐릭터다. 그의 시점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고립된 밀실에 갇힌 후 이 함정에서 무사히 벗어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표가 주어진 인물이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비롯해 수많은 단원들의 죽음을 봤다. 하지만 깊은 슬픔에 지지 않고 강인하면서도 결연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특히 조선 최고 재력가 집안 딸로서 보장된 삶이 있음에도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이하늬는 차경이 "아마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거란 생각이다. 


"재력가 집안에 태어났으면서 목숨 내놓고 독립투사를 할 수 있을까. 차경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극 중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란 대사가 있다. 그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했을까. 사람이 살아갈 때는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며, 한 순간에 무의미한 흙으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며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처음엔 너무 허무하고 해석하기에도 웅장하고 버거웠다. 그러다 차경 대사 중에 '살아. 죽는 건 죽어야 할 때, 그때 죽어'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 차경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는 찬란한 삶을 노래하며 살지만, 그 시절 독립 위해 삶을 내놓은 사람들은 '죽음을 위해 사는 삶'이었을 거라고. 


비극의 시대를 버티고 맞서며 살았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하지만 이하늬는 그럴수록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다. "삶을 투쟁하며 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슬픔을 표출하지 않고 얼마나 응축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인지를 그리려 했다. 그 속에서 차경이 보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느낀 차경은 회색의 질감을 가졌다. "내면은 아주 뜨거운 빨간색 마그마가 끓고 있지만 절대 드러내지 않는." 이하늬는 나직한 저음으로 토로되는 감정과 결연한 행동까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물의 심리를 수려하게 표현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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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접해보지 못한 캐릭터라 차경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것이 좋았단 이하늬는 "쪽빛 하늘에 물들듯,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캐릭터의 한 장면, 한 얼굴, 그 찰나가 생각난다면 저는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관객에겐 한 신으로 기억될 장면이지만, 이하늬는 인물의 깊이 응축된 감정을 켜켜이 쌓아갔다. "처음과 후반의 차경이 다르다. 이 캐릭터도 변모하며 나아가고 있다. 슬픔의 모노톤을 조금씩 벗겨가며 앞으로 뚜벅뚜벅 전진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상적 걸음걸이와 후반부 액션신의 걸음걸이가 다르다. 처음 밀실에 갇힐 때 정면을 응시하는 단단함도 달랐다. 제가 음악을 오래 해서 대사도 음처럼 듣는 경우가 많은데 캐릭터 구축할 때 차경은 조금 울림이 있고 깊이가 파져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의 것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 이처럼 뜻밖의 디테일들을 심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하도 절제된 인물로서 차경을 그리다 보니 꽤 어렵기도 했단다. "어떤 예술의 형태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경지에 오르는 게 정말 극상의 작업이라 생각한다. 국악을 오래 해서 그런지 아주 정적인데 손하나를 탁 치는 순간 나오는, 가느다란 선에서 나풀대는 미학의 아름다움. 이를 떠올렸다. 일차적인 연기 너머에 있는, 아무것도 안 하는 듯 보이지만 수많은 레이어들 사이의 끝에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길 바라며 최대한 절제해 연기했다"고. 


절제된 인물의 액션은 오히려 절도있고 우아하다. 이하늬는 "액션이 확실히 늘은 것 같다"며 환한 미소다. "근력은 체력이다. 꾸준히 몸을 단련시켰고 두들겨 맞자. 많이 맞으면 맷집이 생겨 오히려 안 아플 거란 생각도 했다"고 은근히 웃기기도 한다. 덧붙여 "차경의 액션은 흔들려선 안 됐다. 여기서 보이는 에너지가 차경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지를 나타내기에 더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많이 받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어설펐던 모습도 많이 익숙해지더라"고.


'유령'은 항일영화지만 우아하고 매혹적인 미장센과 더불어 통쾌한 판타지까지 기존의 일제강점기 시대극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하늬는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정말 반가운 영화적인 영화였다. '아, 이런 게 영화였지' 하는 느낌이다. 저도 집에서 OTT를 편하게 보는게 익숙해진 시대지만, 이렇게 완전히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영화적 재미와 쾌감이 확실했다"는 소회다. 


마지막으로 이하늬는 겨울이 추워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떤 역경에도 꺾이거나 변하지 않았던 비극의 시대. 그래도 낭만과 희망을 꿈꿨던 사람들에 대해 위안을 전한다. "이 것이 우리 영화의 메시지라 생각했다. 참 많이 와닿았다. 지치지 않고 될 때까지 한다. 이런 근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지금의 K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며 "저한테 여러 인생의 분기점이 있지만, '유령'은 제 배우 인생에 새로운 분기점이 되는 영화"라고 각별한 애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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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J ENM 제공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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