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 긴 휴가를 마친 그의 특별한 진심 [인터뷰]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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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 긴 휴가를 마친 그의 특별한 진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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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1-12-0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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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이가 소박하게 전하는 진심이 그리도 따뜻하고 다정할 수가 없다. 영화를 다시 찍기까지 무려 23년, 그 지난하고 지난한, 오랜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다사다난했겠냐만, 그저 소모되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소중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로 돌아온 그가 그저 반갑디 반갑다. '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의 특별한 귀환이다.


1996년 한국영화사에 흔치 않은 여성 영화 '코르셋'을 첫 연출작으로 내놓고 2년 후 당대 최고의 아이돌 젝스키스를 배우로 기용해 화제가 된 청춘영화 '세븐틴'을 끝으로 정병각 감독의 작품 활동은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물론 영화 일은 꾸준히 해왔으나 새 작품으로 근황을 알리지 않은 탓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혔다. 그런 그가 23년 만에 신작 '싸나희 순정'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 무려 23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감회가 남달라도 한참은 다를테다. "매일 반응을 찾아보고 있다"며 너털웃음인 그는 "제가 의도했던대로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좋게 봐주셔서 정말 너무 고맙더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고마움과 안도감, 뿌듯함을 넘어 형언할 수 없는 만감이 담긴 듯했다.


류근 시인과 퍼엉 작가의 스토리툰 '주인집 아저씨'를 원작으로 한 '싸나희 순정'은 삶에 지친 시인 유 씨(전석호)가 도시를 떠나 어느 시골 동네 마가리에 뜻하지 않게 정착해 동화작가를 꿈꾸는 뽕밭 주인 농부 원보(박명훈)의 집에 머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담백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련하고 따스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소박하고 소중한 힐링 영화다.


오래도록 연출을 쉬는 동안 그는 솔직하게 "슬럼프를 겪었다"고 했다. "연출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문을 연 감독은 "두 번째 작품 이후 영화와 제 자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고민이 길어질 때 상업영화의 흐름도 2000년대로 들어서며 많이 바뀌고 엄청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그 흐름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당시 동료들을 만나면 올림픽처럼 4년에 한 번이라도 영화를 만들자며 자조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라도 작품을 내는 사람이 '행운아'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모두들 희미해지고, 퇴색되며 잊혀 갔을 테다. 이를 겪는 당사자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어쭙잖은 위로로도 감히 달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야속한 세월이 흐르던 차에 감독은 류근 시인의 원작을 보게됐다. "시인도 시인이지만, 시골 마을에서 만난 주인집 아저씨의 성품과 기질이 정말 좋았다. 류근 시인의 번쩍이는 재능이 곳곳에 스며든 이야기가 정말 매력적"이란 감상이 들었다. 처음엔 스스로 연출을 맡게 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기획에만 참여했다. 영진위 제작지원을 신청하는 단계에서 감독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제 이름으로 냈는데 3수 끝에 선정이 됐다. 어떻게 보면 얼떨결에 덜컥 복귀를 하게 된 셈이다. 후배 작가들과 공동 작업으로 각색에 몰두할 때부터 설레기 시작하고 차츰 실감이 들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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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

 


원작은 시인 유씨와 원보가 나누는 이야기가 주다. 간혹 마을 사람들 몇몇의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원보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이에 감독은 정겨운 마가리 마을 사람들과 그들 각각의 사연을 그려내며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인생의 길잡이 같은 원보를 비롯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마가리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다정하고 풍만한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각박하고 메마른 감성의 유 씨도 이들을 통해 삶의 무력에서 벗어나 위안과 정을 나눈다. 어쩌면 별 거 없는 소박한 이야기가 그리도 따뜻하고 소중할 수가 없다.


감독은 이들을 통해 동질감을 많이 느꼈고 그가 느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유씨는 시를 쓸 수 없는 시인으로 나온다. 알다시피 오랫동안 영화를 못 만드는 감독으로서 저하고 많이 겹쳐져 보였고 교감이 많이 됐다. 원보는 제가 닮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제가 받는 힐링과 위안은 우리 주변에서 보는 아름다운 사람들 때문이다. 작게는 선뜻 자리를 양보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준다거나 하는 선의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아직은 쉽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들이라 이를 보면 아직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 말하길 우리는 '개인'으로 살 수 없다. 다 같이 더불어 사는 삶에서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맺으며, 또 그 도움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런 작지만 소소한 관계가 삶을 지탱하는 힘을 주고 행복을 얻게 한다고. 이런 마음이 잘 녹아난 이야기였기에 그 역시도 두렵지만 다시 카메라를 들 수 있었을 테고, '싸나희 순정'엔 그런 감독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진심은 실제로 많은 이들을 움직였다. 박명훈 전석호를 비롯해 크고 작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반가운 배우들이 마가리 주민들로 등장한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더하다. 이들은 서로의 인연이 닿고 닿아 한 자리에 모였고, 출연료를 자진 삭감하며 영화에 대한 진심을 모았다. 이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전한 감독은 "결과적으로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처음엔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작품을 좋게 봐주신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정말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어릴 땐 실감을 못하던 자녀들이 성인이 돼 23년 만에 아빠가 만든 영화를 보고 "아빠가 영화감독이 맞긴 맞네"라고 이야기했단다. 가족들의 인정만큼 더 큰 기쁨은 또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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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감독에게도 '싸나희 순정'은 특별하고 소중한 작품이다. 막상 촬영 당시엔 저예산 영화의 한정적 스케줄, 계속되는 태풍과 장마 그리고 찌는 듯한 무더위로 애를 먹었지만 고생 끝에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마을 풍경들을 담을 수 있었고, 더욱 리얼한 배우들의 열연을 담아낼 수 있었다. 감독에겐 이 모든 것이 돌이켜보니 그저 '행복'이었다. "동료나 선배들도 다들 힘들어한다. 저도 마찬가지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창작을 업으로 삼는 아티스트들은 다 그럴 거다.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은 소수다. 하지만 힘들어도 살아진다. 물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 모든걸 견디며 삶을 배우는 거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삶도 변화하고, 그렇게 견디며 배우며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제가 이렇게 운 좋게 멋진 작품을 만나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듯, 그 믿음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정병각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아직 우리 사회가 살만한 세상이란 걸 보여주고 싶은'순정'이 있다.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돋보이고, 그들이 골고루 이뤄나가는 이야기들로 이뤄진 드라마. 그리고 대사나 연기만이 아닌 춤과 노래, 시. 일종의 문학적인 장르를 끌어들여 종합적인 예술을 담아내는 작품. 그가 추구하는 낭만적인 작품 세계다. "비록 큰 개성은 아니지만 제 작품의 특징이고 갖추고 싶었던 모습이다. 또 영화를 할 기회가 주어지면 이를 좀 더 좋게 다듬어서 보여 드리고 싶다"는 감독의 바람이다. 여전히 낭만을 꿈꾸고 진심을 전하는 정병각 감독의 작품 세계를 오래도록 보고 싶다. 

 

사진=(주)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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