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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겨울, 나는' 스물아홉, 배우 권소현 [인터뷰]

    어느덧 스물아홉, 이십 대 끝자락에 가 닿은 이는 생각보다 더 깊이 있고 성숙하며 평온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언행이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연기에 대한 더 깊은 갈망과 열정이 있다. 배우 권소현이다.   스물 아홉 청춘 커플의 어느 겨울 이야기를 그린 '그 겨울, 나는'(감독 오성호)은 퍽 시리다. 너무도 현실적이고 섬세한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이, 아마도 지난 청춘 시절에 겪었을 법한 처연하고 애틋했던, 그러나 그렇게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감정들을 건드리는 탓일 테다. 영화에는 오랜 취업 준비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지만, 동거 중인 남자 친구 경학과의 소소한 일상이 행복하고 든든한 스물아홉 살의 혜진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경학이 엄마의 대출 빚을 떠안고 경찰 시험도 미룬 채 대책 없이 배달일에 몰입하기 시작하며 둘 사이에 불안한 틈이 생긴다. 엄마의 잔소리, 사회적인 압박,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 남자 친구의 피해의식과 열등감 등등 혜진의 세계는 정처 없이 혼란스러워진다.  권소현은 그 미세한 균열과 갈등, 불안을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낸다. 무려 첫 주연작에서 이토록 사실감 넘치는 모습으로 저만의 존재감과 숙성된 연기력을 발휘하는 그가 놀랍고 꽤 대견했다. "하루하루 반응을 찾아보고 있는데 영화를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아서 기쁘다"며 수줍게 웃으며 말문을 연다. 알고보니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작품을 평소에도 좋아했던 그다. "팀 활동이 끝나고 연기활동하며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본 뒤 멍하니 1분, 5분 앉아 생각에 잠기는 영화를 선호한다. 단순히 재미있다, 없다란 감상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이 계속 맴도는 영화를 좋아한다. KAFA 작품은 제 평소 취향이 반영된 작품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더 욕심이 났다"는 설명이다.   '그 겨울, 나는' 또한 그토록 갈망하는 KAFA의 작품이며 현실적인 시나리오까지, 어떤 감정인지 공감했고 연기하고 싶었다. 무려 3차까지 이어진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발탁됐다. 권소현은 감독의 전작을 찾아보며 스타일을 파악했고, 최대한 꾸밈없는 현실적인 연기를 하려 노력했다. 막상 캐스팅된 후에도 계속 치열했다. 모두가 치열하고 열정적인 순간이었다고. 그 속에서 권소현은 기뻤고 즐거움을 찾았다. "감독님께서 굉장히 섬세하시다. 각 개인의 경험과 말투도 다 듣고 수정본에 넣어주신다. 그래서 배우들끼리도 더 많이 얘기했고 어떻게 하면 더 사실스럽고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개인적인 경험을 녹여내기도 했다"고.    권소현은 단순히 같은 나이 때문이 아닌, 스물아홉 혜진의 마음과 상황을 지난 경험을 통해 더 깊이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었다. "남들보단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다. 제 나이 기준으로 스물셋, 넷이 혜진의 스물아홉이라 생각했다. 포미닛이란 십대 시절의 좋은 추억을 1막으로 봤을 때 이를 끝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느낀 혼란스러움, 그때 느낀 현실의 벽, 그때 맞닥뜨린 무게감 등이 있었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데, 과거에 있었던 무언가 들이 계속 맺혀있는 것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걸 이겨내고 가보자 했을 때 그 기저에서 끌어 나오는 살기 위한 힘이 있더라." 청춘의 끝자락에 놓인 혜진의 심정도 가장 아프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 거라는 그는 "그때 큰 일을 한 번 겪고 회복되면 오히려 치솟는 힘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며 확실한 위로를 건넸다.  그가 고민하며 녹여낸 혜진의 일상적인 모습, 대사, 표정들은 그토록 사실적일 수가 없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하게 된 혜진이 남자친구에게 "사회생활 안 해봐서 그래"라고 상처를 주는 핀잔도 애초엔 다른 대사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며 점차 서로를 상처주기 시작할 때 내뱉는 말들이다. 더 잔인해 보일 것 같아 바꾼 대사였다. 마지막 순간에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사 또한 많은 의미가 담겼다. "이미 혜진은 정리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슬프다고 생각했다. 힘들지만 냉정해지려는 마음이었을 거고, 경학이는 가장 오래 연애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청춘, 추억, 내 많은 모든 것들이 이 친구와 접점이 있고 좋은 기억도 많을 텐데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이처럼 깊이 공감하고 인물에 체화될만큼 많은 고민과 노력의 순간이 있었을 테다. 심지어 극 중 흡연 신도 난생처음 담배를 입에 대본 것이었다. 그는 "감독님께 꼭 담배로 해야 하느냐고 여쭸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느낌이 이것 말고 또 있다면 바꿔보자 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만큼 복합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설정이 없더라"고. "현실적인 커플의 모습으로 봐주실지도 제겐 큰 도전이었다. 오랫동안 팀의 막내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그래서 난 튀고 싶지 않아, 튀면 안 돼 라는 감정이 항상 깔려 있었다. 불안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저 스며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제 스스로 걸었던 '리밋'에 닿으니까 이를 벗어나 보고 싶어 졌다"는 그의 속내에 말로 다 표현 못할 무수히 많은 감정이 담겼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자신이 보여야 할 모습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시절, 남들이 원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자아가 희미해지던 순간, 모든 것을 그저 제 몫으로 감내했을 그가 새삼 더 어른스럽다. 밤마다 기도할만큼 간절히 바라며 배역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던 순간,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모두 거쳤고 이는 모두 배우 권소현을 지탱하는 단단한 밑거름이 됐다. 그는 여전히 성장한다. 좋은 작품을 만나 성장할 수 있는 건, 그 역시도 좋은 배우란 뜻일 테다.  권소현은 유독 이 작품에 애정이 많다. 그럴만도 하다. "처음으로 같이 만들어가는 작품이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를 생각하며 맞춰갔는데 내가 얘길 해도 되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구나, 말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분명해졌다. 이 영화를 하며 내 직업을 배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연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욕심이 생기게 됐다"고 말한다. 또 어서 빨리 30대가 되고 싶다며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할 수 있는 모든 고생과 경험을 해서 다행"이란 '웃픈' 너스레도 떨 줄 안다.  권소현은 연기가 이토록 재밌다. 최근 겪은 경험이다. 보통 힘을 빼며 하는 리허설 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진짜 감정이 걸렸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저의 어떤 모습이나 진짜의 순간을 카메라가 담아줄 수 있다는 게 정말 부담은 크지만, 진짜 좋다. 예상치 않게 나오는 '진짜'의 감정이 담길 때"라는 그는 이제 제법 연기를 즐기게 된 듯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매년 독립영화를 하고 싶다. 그 과정이 정말 좋다. 치열하고 답답할 때도 있고 쫓기면서 하지만, 이를 기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모습과 그 기운이 정말 좋았다"며 황홀경에 빠진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의 다음 작품이 몹시 기다려진다.      사진=매니지먼트 오름 제공, 영화 '그 겨울, 나는'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