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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전2' 차승원의 지독한 설욕전 [인터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자신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배우 차승원의 모습은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친다.  차승원이 설욕전을 제대로 치렀다. 5년 만에 돌아온 미드퀄 '독전2'에서 전작의 치욕과 수모를 무시무시하게 응징한 데다 최후의 승자로 생존한 브라이언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사망한 데다 염원하던 이선생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됐으니 '독전2'는 메인 빌런인 브라이언이 최종 주인공인 셈이다.  전작에서 유령 마약 조직의 보스 '이선생'을 사칭하다 지독하게 당한 그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차승원은 브라이언이 가장 압도적이었단 '독전2'에 대한 평가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마 분량은 전과 비슷할 텐데 1편은 워낙 기억에 남는 캐릭터들이 많았고, 지금은 그 하중을 넘겨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이어 "미드퀄이란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는 어떻게 하려나 궁금증도 있었고, 2편을 찍기 전엔 브라이언이 죽은 줄 알았는데 막상 죽었단 정보가 없어 가능하겠다 싶었다. 제 역할만 따져서 봤을 때는 그래도 마무리가 잘됐으니 이 정도면 브라이언으로써는 괜찮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전작의 과오로 인해 몸에는 끔찍한 화상을 입었고 거동이 불편해 전동 휠체어에 의지한 채 등장한 브라이언은 자칫 하찮고 노쇠한 모양새로 비칠 수 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는 더욱 강력해진 탐욕과 욕망을 드러내며 이를 무섭게 실행해나간다. 하도 휠체어에 앉아 몸을 웅크리느라 "배에 쥐가 많이 났다"고 너스레인 그는 "누구는 왜 등을 기대고 안 앉냐고 하는데, 아니 영화 본 거야 안 본거야? 아파 죽겠는데 등을 어떻게 붙여"라며 웃겼다.  이어 "어렸을 때 작은 아버님이 폴레우레탄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왁스가 터져 전신화상을 입으셨다. 그때 병원을 자주 갔는데 진짜 고통스러워하시던 모습과 소리들이 있었다. 나이가 한창 들어서 봤을 때도 비 오는 날이면 계속 손이 오그러들기도 하고 그러셨다. 그런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 기억을 착안해 브라이언의 외형을 잡아갔다. "데미지가 있으니 신체를 못 움직이는 만큼 얼굴은 전편과는 다른 얼굴을 표현하려 했다. 전편에선 허세와 허풍이 묻어난다면, 큰 일 겪고 그렇게 아프고 나면 확 늙는 얼굴을 보여주려 했다"고. 침을 흘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다시 "영화 본 거야 안 본거야? 약한 사람들 특징이다. 아픔을 그걸로 견디니 침은 더 많이 흘렸고 아주 달고 살았다"라고 너스레를 떨며 폭소를 자아냈다.  영화 '낙원의 밤' 마이사와 '독전' 시리즈의 브라이언까지, 차승원 특유의 개성이 묻어나는 악역 캐릭터는 그만의 노하우와 철칙이 있었다. 젠틀하고 냉정하며 사악하지만 의외로 독특하게 웃긴(?) 기묘한 인물. 차승원은 이를 두고 "전 유머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 요소마다 이런걸 찾기 바쁘다. 마치 보물찾기 같다. 물론 이런 스릴러, 누아르 장르는 장르만의 매력이 있지만 이게 고착화 됐을 때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완충되는 지점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걸 찾는 거다. 이게 유기적으로 들어갔을 때 확 와닿는다"고 했다. 이어 "나이도 들다 보니 어떤 역할을 맡아도 '꼭 이걸 이렇게 해야 될까?'란 이상한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이 인물은 굉장히 무섭고 말수도 없다. 근데 꼭 이래야 될까? 란 생각이다. 분명 나한테 이 인물을 준 이유가 있을 텐데 활자 그대로 연기하면 이유가 없잖나. 그래서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절충하에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차승원은 "처음 브라이언을 봤을 때 얜 뭐야?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이랬다. 이름부터 재수 없는 캐릭터들 있지 않나"라며 웃긴 뒤 "이렇게 땅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캐릭터를 되게 싫어한다. 내 나름대로 안착시키기 위해 허풍도 있고 빈 구석도 있는 인물로 내 나름대로 안착시킨 거다. 이러다 의외의 상황에서 찬 바람이 싹 불어오는 순간 더 강렬해질 거란" 판단이었다.  극 중 탐욕을 위해 형과 친아버지를 무참히 죽일 수 있는 지독한 악인임에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자애로운 언어들을 구사하고 흰 옷만 애용하는데다 독특한, 이른바 '소녀머리'라 불리는 장발을 구사한 채 등장한 브라이언이 그 많고 강렬한 '독전' 캐릭터 속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래서다. 게다가 2편의 최후 승자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탐욕과 복수의 화신이 된 그는 병자의 모습으로 등장했음에도 전편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홀로 극을 휘어잡을 정도다.    전작에서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락과 한 배를 타며 의외로 대인배 모습을 보여주다가 알고보니 그를 이용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고 농아 남매에게 지독한 복수를 하는 브라이언의 행보는 특히 강렬하다. 이에 차승원은 "더 쳐 죽였어야 했다"고 익살을 떨어 또다시 폭소를 유발했다. 그는 "토치로 지지고 애들 눈도 멀게 하고, 입도 찢어버릴 듯하잖나. 일차원적인 복수가 사실은 웃긴 거다. 하지만 그게 인간이잖나. 다 죽였어야 했다"고 웃겼다.  다만 전작의 설정이 붕괴된 지점들은 시리즈 팬들에겐 원성을 사는 요소다. 차승원 또한 이를 인지했다. 그는 "아무래도 전편이 있으니 비교 대상이 있고 이런 콤플렉스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영화다. 전작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 주혁이가 워낙 강렬했기에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 이상 해내기도 힘들다. 그래도 효주나 승훈이를 봤을 때 용기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하고 참 성실하고 열심히 연기했다. 이미 우리 품을 떠났으니 왈가왈부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평가와 결과를 차치하고 찍을 땐 정말 행복하게 찍었다"고.  한 시대를 풍미하고 여전히 롱런하는 배우 차승원은 "예전엔 존감만 있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도 오래 하다보니 자존감이 생겼다. 한쪽에 국한된 편협한 시각이 놔지더라. 배우로서 언젠가 내려올 시기가 있다. 그래도 괜찮다. 자신이 있다. 그게 없을 때 일을 관둘 거다. 지금까지 내 자리가 있고 내 롤이 있어서 충분하고 괜찮단 생각이다.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훨씬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많은 사랑을 해주시고 찾아주셔서 더 자존감을 지킬 수 있게 됐다"고 근사하고 당당한 소신을 전했다. "지금까지도 잘해왔고, 앞으로도 한 거보다 할 게 더 많다"고 과거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걸음이 활기차고 긍정적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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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전2' 마침내 해방된, 조진웅 [인터뷰]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실체 없는 '맥거핀'을 하염없이, 그리고 지독하게 쫓아온 한 남자의 여정. 이를 비로소 끝낸 배우 조진웅은 퍽 후련해 보였다.  5년 전, 아시아를 지배하는 유령 마약 조직의 보스를 지독하게 쫓는 남자 원호의 여정을 그린 '독전'이 '미드퀄'이란 명분으로 다시 돌아왔다. 원호가 뉴질랜드로 사라진 락을 찾으러 가기까지의 비어있는 시간과 공백을 메꾼 이야기로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원호 역을 맡은 조진웅은 '이선생'을 맹목적으로 쫓는다. 제 고집에 부하가 죽고, 이로 인해 갖은 비탄을 받으며 스스로도 죄책감에 괴로워할지언정. 이미 맹목적인 신념은 광기로 바뀐 지 오래인 원호는 마침내 이선생의 실체를 알고 끝에 직면한 뒤 허무함에 휩싸인다. 마지막 또한 허망한 결말이다.  앞서도 "왜 범죄영화란 장르가 나에게 혼란스러움과 질문을 주는가"라며 '독전'이 담은 심오함과 허무주의, 그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고뇌했던 조진웅이 왜 다시 이런 원호의 여정을 따랐을지가 궁금했다. 그 역시 '독전2' 제안을 받고 할 엄두가 안 난다며 "힘들다, 못하겠다" 했단다. 그러나 집필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먹먹하고 깊은 감정이 치밀었다고. "사실 이선생을 잡으려고 쫓아왔던 원호가 더 갈 데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니까, 인간 본연의 모습에 더 외로워지고 슬퍼지더라. 눈물도 나고 막막했다.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달려만 왔는데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씩 하는 질문 아닌가. 그 많은 질문 앞에서 드디어 해방되지 않았나. 이걸 끝으로 원호를 잘 보낼 수 있겠구나."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원호를 연기하며 유독 스스로를 많이 대입했다. 형사가 범인을 잡기 위한 행위는 지극히 일반적인 정의구현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선생을 수십 년간 쫓으며 알 수 없는 신념마저 생길 정도로 광적인 집착을 하는 자신을 어느 순간 깨닫고 이토록 맹목적인 목적이 결국 제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 이 허망함과 허무감에 지독하게 빠져 있었다. 하지만 비로소 해방감을 맞게 된 그는 '죽음'이란 결말을 맺은 원호를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가장 '독전'다운 원호의 해방이지 않을까."  그랬기에 먹먹한 한편 평안을 느끼기도 했다. "제 삶에 빗대어 원호를 연기했다. 심각하게 한 번쯤 본인 스스로를 돌아보는 철학적인 재미를 가져보는 것도 재밌겠단 생각이 들었다. '독전'을 하며 저를 많이 돌아보게 됐다"는 그는 "배우라는 직업은 항상 철학적인 거울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 같다. 그동안 이를 놓치며 살때가 많은데 작업하며 다시 느끼게 돼 좋았던 것 같다"고 후련해진 속내를 털어놨다. 이제야 비로소 깨끗하게 지워낼 수 있다는 소회다.    '독전2'의 연출을 맡은 광고 감독 출신의 백 감독이 엔딩 크레딧을 마치, CF 한 장면처럼 찍어놓은 신은 특히 이색적이었는데 이를 두고 조진웅은 "원호로 들어와서 조진웅으로 나가는" 의미라고 알렸다.  원호를 연기하며 수없이 많은 감정의 파도에 휩싸였던 조진웅이 비로소 해방감을 맞았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원래 이성적인 사람인데 한번 감정의 소용돌이가 치면 한없이 들어간다. 제 속의 동굴로 너무 들어간다. 그래도 해야 될 일이 있으니까 이내 헤쳐 나온다. 고민을 빨리 떨쳐내려 한다. 지금의 이 먹먹함이 치유될 순 없겠지만, 영화 보는 순간 소주 한잔 하며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됐다"며 '독전2'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독전' 속 정말 독했던 등장인물들 모두를 "외로운 인간군상들"이라고 했다. "누구나 다 파고 들어가보면 외로움이 있다. 소속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개인 스스로 욕망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달려갈 수밖에 없는 지점도 생긴다"고. 또 이런 외로움을 느끼니 측은한 감정이 들어 어루만지고 싶어지는 기분도 있다고 했다. "잘 보낸 것 같다. 잘 보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라며 비로소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앞으론 좋아하는 멜로 영화를 하고 싶다고 너스레를 떤 그는 "치열한 과정에서 웃고 울고 했던 한 해"였다며 올해를 돌아봤고 마지막으로 "'독전'이 결실을 맺어 관객에 선보이게 돼 기쁘다"고 짤막한 소감을 남겼다. 이제야 속이 후련해진 듯한 조진웅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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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들', 40년을 한결같은, 정지영 감독 [인터뷰]

    정지영 감독은 참으로 한결같다. 언제라도 부당함과 불합리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고, 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시대의 이면을 파헤치고 소외된 이들의 울분과 고통을 함께 했다. 이 시대의 가장 가치 있는 이야기, 결코 외면해선 안 될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끊임없는 화두를 던지는, 40년 차 명장의 품격은 고귀할 따름이다.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를 잇는 정지영 감독의 실화극 3부작 '소년들'. 1999년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소재로 무고한 소년들이 살인범으로 지목돼 17년만에 무죄가 입증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영화다.  어느 날 정지영 감독은 약한 자들이 공권력에 저항도 제대로 못한 채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힘 있고 가진 자들은 이를 이용해 출세하며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부조리한 이야기가 숱한 재심 사건 속에 비일비재함을 느꼈다. 약촌 오거리 사건으로 처음 접근을 했으나 이미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단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또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알게 됐다. 사건의 내용이 깊고 넓다고 여긴 감독은 영화화를 결심했다.  실화 소재의 영화는 장단점이 명확했다. 많은 이가 알고 있으니 알려지긴 쉽지만, 다 아는 얘기인 만큼 흥미를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축약한 사건으로만 보여선 안 된단 생각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좀 더 배경과 깊이를 갖춰야 하고, 관객을 만날 때 이 사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접근을 통해 이해와 깨달음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려진 사건에 대한 결론만 기억하기 쉽지만, 어떤 사건이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그 사건의 내막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그 과정 속에 우리 사회의 구조가 보인다"는 정지영 감독.  처음엔 사건을 사실대로 따라가며 17년의 연대로 풀었는데 산만하고 복잡했다. 이를 힘있게 끌고 가는 인물로 실제 약촌 오거리 속 진범을 파헤치기 위해 애썼던 황 반장을 캐릭터화시켰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리듬을 찾았다.  감독은 애초부터 황 반장 역에 설경구를 염두했다. "이 사건을 끌고 가기 위해 자기 조직과 싸워야 하는, 그 정도의 배짱을 가진 거침없는 이미지가 필요한데 얼핏 강철중이 떠오르더라. 젊을 때 강철중이 나이가 들었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연상했다. 평소에도 설경구랑 일을 해보고 싶었다. 17년이란 세월을 뛰어넘는, 늙어서 초라해진 모습까지 그 변화를 녹일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한데 그가 쉽게 소화할 거란 생각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막상 촬에 임하면서도 제일 어려웠던 것은 법정 신에서 피해자들이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심정을 마음으로는 이해해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겠나. 연기자들에게 맡기고 끝까지 지켜봤다. 그들이 외칠 때 처음엔 오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배우들이 캐릭터를 연구하며 감정에 이입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선택이 맞단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30대지만, 감옥에서 살았고 사회생활도 익숙하지 않고 다른 이들보다 배우지 못했으며 여전히 순수한 감성을 지녔다. 그러니 이성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솔직한 심정이 나올 것이다. 게다가 몇십 년을 참아왔다. 그런 울분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연기한 게 맞다고 여겼다." 해당 장면은 사건의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도 감격한 신이다. "객관적으로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찾는 그런 모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마음에서다. 실제 피해자 역시 시사 이후 감독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고마움을 전했다. 감독은 오히려 많은 감정이 교차하더란다. "착잡하고 뭉클하며 한편으론 고마웠다. 사실 그들이 허락을 해줘서 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또다시 제가 상처를 주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그들이 잊고 싶은 사건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고맙다고 해주니 잘했구나 싶고 상당히 많은 감정이 일더라"고.    1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한 이들이지만, 정작 소년들의 인생을 처참하게 짓밟은 사건 당사자들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이에 "죄의식을 갖지 않은 자들이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요소 같다. 검사가 나중에 사과했다는데 진정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는데 왜 이제야 했나. 제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힘 있고 가진자고 머리도 좋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짓을 합리화하며 약한 자에게 군림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냉정히 딱 잘라 말하는 감독이다.  정지영 감독은 '소년들'로 실화극 3부작을 완성했다. 더러는 부러 회피하고 외면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감독의 사명감은 참으로 남다르다 말하기도 한다. "40년을 돌아보니 이 사명감이 참 부담이다. 좀 더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를 구속하더라"고 너스레인 감독은 "제가 40주년 행사를 하니까 과거를 돌아보게 되더라. 사실 제가 허무주의자다. 이 사회가 과연 나아질까 물으면 안 나아질 것 같단 생각이다. 이 허무의식을 영화를 통해 극복하는 모양이더라. '부러진 화살'이나 '블랙머니'를 봐도 항상 지는데도 불구하고 비전을 만든다. 영화를 통해 비전을 만들고 그러면서 삶의 원동력을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사회에 대한 분노도 큰 힘이 된다. 분노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했다.  "사실 제 영화들이 정의 구현 영화라고 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 어디로부터 왔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이게 맞는 것인가를 묻고 토론하기 위한 것이지,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정의라는 것도 사람에 따라 살아온 환경과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만약 어떤 주장을 한다면 '혹시 이게 맞는거니?'라고 묻는 것이지 '이게 맞다'고 하는 건 아니다."  감독이 희망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각자 도생하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사회"다. 그리고 늘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저 무심코 지나치고 나와는 상관없다 여기는 일도 다시 한번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그저 감독의 바람이다.  여전히 스스로의 작품에 만족하긴 어렵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에너지와 최선을 다한 긍정의 마음으로 작업에 임한단 정지영 감독. 그는 앞으로도 "철들지 않는" 삶을 꿈꾼다. "완숙이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반숙이 맛있을 때도 있지 않나. 40년을 감독했어도 아직 철이 덜 들었기에 완숙미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완숙이 되겠지. 하지만 그때도 영화를 하고 있을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에 은퇴를 하는데 아직도 버티고 있는 건 행운이다."   사진=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