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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비' 조진웅, 아프게 꼬집힌 감정들 [인터뷰]

    배우 조진웅은 언제 봐도 특유의 깊이와 단단함이 있다. 올곧은 성정 탓이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낯선 얼굴, 이른바 비릿하고 추악한 검은 욕망의 민낯을 드러냈을 때 충격의 여파는 더 크고 허를 찌른다.  1992년, 현행 헌법 사상 처음으로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진행되던 당시의 정치판을 배경으로 한 범죄 영화 '대외비'에서 조진웅이 맡은 해웅은 빽도 족보도 없이 뚝심 하나로 20년을 정치판에서 구른 인물이다. 밑바닥 정치 인생을 끝내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그는 적당히 허세도 있고, 나름의 정의감과 사명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당내에서 버려져 공천에 탈락하고 정치 자금도 쪼들려 궁지에 몰린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던 해웅은 행동파 조폭의 돈과 힘을 빌리고 해운대구 재개발 계획이 담긴 대외비 문서를 손에 넣어 권력 실세라는 거대한 힘을 무너트릴 판을 짠다.  빚에 시달리지만 성공한 정치인이 되고 싶은 해웅의 욕망은 초반에는 순수하고 정의롭다. 시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은 열망. 좌절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나서 어떻게든 검은 권력과 맞서려는 의지까지 응원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꼬이는 상황과 숨 막히는 압박이 거듭되며 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진웅은 평범한 인간이 권력에 사로잡혀 결국 타락하고 악으로 기울어가는 인물의 서사를 안타까울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의 세밀한 감정 연기와 변화가 새삼 무서울 정도다. 조진웅은 김구 선생의 젊은 시절을 그린 영화  '대장 김창수'에 이어 이원태 감독과 다시금 호흡을 맞췄다. 감독은 "이번에도 어려운 작품을 줘 미안하다"고 했고, 조진웅은 "알면서 주시느냐"고 너스레를 쳤다고. 해웅은 영화의 메시지를 관통하고 대변하는 인물이다. 권력의 속성으로 인해 변화하는 인물. 그 복잡다단한 감정적 서사를 오롯이 담아내야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에 쉬운 캐릭터는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는 오히려 '대외비'를 통해 제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고,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두고 관객도 깊이 있는 조망을 하길 바랐다. "해웅은 끊임없이 '딜'적인 상황에 놓여 고민한다. 스스로 이 방법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인정하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과 결국 자신의 욕망도 이를 원하게 된다. 어떤 이정표를 따라 악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해웅을 디테일하게 만들고 표현해야 사람들이 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내 모습도 저렇지 않은가 돌아보기도 할 것 같았다"고.  그 역시도 점차 타락하는 해웅의 선택을 보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얘는 무슨 생각을 하지?' 하면서도 옳지 않은 걸 알면서 선택하게 되는 순간들, 혹은 그런 망설임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무명 시절 작은 작품에 조연으로 구두 계약을 맺었다. 그때 더 큰 작품에 주연으로 딜이 왔다. 작업 시기가 겹치는 상황, 선택을 해야 했다. 후자를 택한다면 배우로서 성공의 길은 좀 더 빨라질 것이었다. 분명 먼저 기회를 준 전자의 상황을 택해야 하지만, 인간적으로 흔들리게 되더라고. 결국 그는 전자를 택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한 번 모른척 하면 되는데'라고 후회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 작품이 너무 아프게 꼬집어주더라." 말은 그렇게 해도, 조진웅 특유의 한결같은 성정은 결국 요행을 바라지 않고 옳다고 믿는 길과 의리를 택했다. 너무도 그 다운 선택이다.    정치인 특유의(?) 그럴싸한 외면을 위해 살도 조금 찌웠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는 인물 보면 대부분 멀쩡하게 생기진 않았잖나"라며 웃긴 조진웅은 "피상적으로 든 생각이다. 딱 떨어지거나 댄디한 모습과는 안 어울릴 것 같아서 살을 조금 찌웠다. 배가 살짝 나온게 귀엽기도 하더라"고 웃는다. 주안점을 둔 건 의외로 연설 장면이었다. 그는 "연설의 패턴을 읽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그는 국회의원들의 연설 장면을 많이 참고했다. 후보 시절의 연설과 당선 후의 연설문이 미묘하게 다르고, 각자의 스타일로 각색하고 호흡을 맞추는 패턴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디테일하게 공을 들였다. 이에 "저는 어쨌든 공천도 못 받았고 무소속으로 나와 너무나도 절실하니까 그런 외침도 있어야 하고, 꼭 돼야 한단 것을 어필하고 신뢰감을 무조건 쌓아야 하기 때문에 연설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몽타주였다"며 "제 화법에 맞춰서 만들어보기도 하고 진짜 강하게 각인될 수 있도록 연습했다"는 설명이다.  극 중 해웅을 무너뜨린 숨은 권력 순태 역의 이성민과는 이미 각별한 인연을 자랑하는 조진웅이다. 두 연기 장인이 만났으니 당연하게도 강렬한 시너지가 일고, 이는 '대외비' 속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특히 순태는 해웅의 숨을 옥죄어오는 막강한 절대 악이며, 해웅은 그를 상대로 순응하기도, 발악하기도, 꾀를 내기도 하며 치열하게 부딪힌다. 특히 순태와 맞붙은 해웅이 식은땀을 흘리는 찰나의 포착만으로도 숨막히는 긴장감과 공포를 야기한다. 이에 "현장이 덥기도 했고 우연찮게 거기서 땀이 딱 흘러내리더라. 얻어걸렸다"고 눙을 친 조진웅은 "그 정도의 긴장감은 당연히 흐를 거고, 이를 들키지 않으려 했다. 같이 연기해 봐야 이 느낌을 아실텐데"라는 짧은 너스레로 이성민과 그의 연기를 애정하고 존경했다.  "이 작품의 엔딩은 해웅이 권력의 정확한 기생충이 되는 것"이라고 못 박은 조진웅은 "이 영화가 우리가 의도한 지점들을 잘 찾아갔다. 이왕에 어두울거면 완전히 어두운 게 맞지 않나.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게 하고 권력의 민낯을 보게 한다. 이런 결말을 보며 과연 이렇게 사는 삶이 좋은가, 맞는가를 생각하게 했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게 우리가 해야 될 일인 것 같다"고 했다. "경중이 다를 뿐이지, 살면서 고민의 순간들이 오고 옳지 않은 길을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걸 한번 따끔하게 꼬집어볼 수 있는 영화였다. 전 작업하면서 많이 꼬집혔다. 많은 반성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고, 살면서 좀 더 옳은 방향의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고.  조진웅은 이처럼 작품의 메시지를 깊이 공감하고 사유하는 배우다. "이런 메시지를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저 스스로를 다시금 점검하고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돼 제겐 감사한 영화였다"는 그의 진심에서 그의 올곧음, 따스하고 정의로운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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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비' 이원태 감독의 사명감 [인터뷰]

    이원태 감독의 주제의식은 한결같다. 사회의 어두운 면과 부조리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이다. 시대의 병폐와 인생의 아이러니를 담고자 하는 감독의 기조는 어떤 이야기 속에도 살아 숨 쉰다. 감독으로서 뚜렷한 사명을 가진 만큼 제 역할에 충실하는 그다.  영화 '대장 김창수' '악인전', 그리고 첫 드라마 '법쩐'에 이어 이원태 감독이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는 '대외비'다. 이전까지와 닮은 듯 미묘하게 다르다. 1992년,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치뤄진 대한민국 정치판을 배경으로 택한 '대외비'는 정치인, 조폭, 숨은 권력 실세 세 인물을 주축으로 맞물리며 권력의 추악한 속성을 마주한 인간의 민낯과 욕망의 꿈틀거림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 끝은 지독한 절망과 낭패감으로 가득해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다. 허구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영화적 스토리임에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현실 정치의 환멸적인 지점들이 맞닿아지니 무서운 사실감을 자아낸다. 이전까지 시스템에 저항하고 맞서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전하던 감독의 방식과는 의아할 만큼 완연히 다르다.  감독은 "제가 염세적인 사람은 아니고 낙천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이라고 너스레로 말문을 연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를 구성해나고 이끌어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여기엔 무서운 속성이 있다. 이탈리아 사상가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우선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대외비'를 각색하며 감독은 내내 이 말을 떠올렸다.  92년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것도 중요했다. "불과 얼마전엔 87년 민주화 항쟁도 있었고 올림픽도 치렀다. 당시 20대 초반 때 그 과정을 쭉 겪어왔다. 정말 우리나라는 비교할 다른 예가 없을 만큼 다이내믹했다. 빠르게 변하고 급진적인 터닝포인트도 많았다. 정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거란 생각을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정치의 속성은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는 2~3천 년 전 그리스 로마 시대 정치인들과도 다르지 않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변하지 않고 정치의 속성도 변하지 않는다"는 감독이다.  그랬기에 '대외비'에 인간의 욕망과 한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과 배신, 권력의 비정함 등의 키워드를 떠올렸다. 그가 여태껏 살면서 보고 배우고 쌓아올린 세계관과 더불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담론을 담아 넣으면 가치 있는 작품이 될 거란 생각이었다.  1년의 각색을 거치며 세 인물의 각기 다른 차별점을 그려내는 것이 가장 큰 중점이었다. 그가 말하길 국회의원 후보 해웅(조진웅)은 생존 위기에 내몰려 살기 위해 악해지는 인물이다. 해웅의 변화하는 모습에 방점을 두려 했다. 숨은 권력 실세 순태(이성민)는 공간을 통해서만 캐릭터가 드러나게끔 설계했다. '뭐 하는 사람이지? 직업이 뭐지? 돈이 많나?' 이 같은 의문점들이 계속 맴돌면서 '이 세상에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존재하는 힘'이라는 모호한 존재로 설정했다. 순태가 숨은 힘이라면 정치 깡패를 꿈꾸는 조폭 필도(김무열)는 움직이는 권력이다. 감독은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강조했다. "권력은 폭력의 일종이다. 정치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쥘 수 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드는 것도 폭력이다. 지배하는 힘이 권력인 셈이다. 필도의 권력은 물리적으로 나오는 힘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몸도 더 억세 보이도록 하고 더 강하고 진한 위압감을 주려 했다"는 설명이다.  감독은 이처럼 세세한 인물의 디테일과 상황을 설정하면서도 배우들엔 디렉션을 일절 하지 않았다. "글이 꼼꼼하고 좋으면 그 안에서 배우 분들이 충분히 상상하며 연기하실 수 있기에 제 몫은 이들의 연기가 어색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감독이다. 이원태 감독 특유의 선함과 배려, 성실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탓에 어둡고 추악한 욕망으로 채워진 '대외비'의 결말이 더욱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감독은 "진짜 권력으로 대변되는 욕망 앞에선 해피엔딩이 안 만들어지더라. 사람이 살아온 몇천년의 역사를 보면 참 비정한 게 많다. 사람의 존재 자체는 약하고 욕망은 세다. 권력과 돈은 비정하다. 그런 속성을 꼭 그려내고 싶어 이 작품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다시금 의도를 분명히 전했다. 이어 감독은 '대외비'가 "영화적이면서도 사실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작품을 두고 프랑스 배급사 대표가 "혹시 우리나라 이야기를 두고 시나리오를 썼느냐"고 물을 정도였단다. 이처럼 감독이 담고자 했던 것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속성과 본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극 중 해웅은 감독의 메시지와 의도를 가장 잘 담아낸 캐릭터다. 해웅은 정치인으로서 나름의 순수함과 정의를 가진 인물이다. 그가 절대 악과 맞서며 벌이는 일은 초반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직업의식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압박하는 환경에 의해 결국 본질적인 정당성을 잃고 스스로 타락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고 순응한다. 그를 변화시킨 환경적 요인은 인간의 욕망으로도 비롯되고 절대적 권력을 쥔 이들의 힘으로도 발현된다. 이에 대한 감상과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감독은 그렇기에 "욕망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줘야 했다. 세상의 좋은 면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것보다 어두운 면을 좀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중이 눈치채지 못한 불편한 진실을 밝히기로 한 감독의 용기이자 사명이 '대외비'란 제목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시대적 병폐와 부조리는 여전히 무수히 많을 테다. 그 속에서 가치 있는 판단을 하길 바라는 감독의 바람이 담긴 '대외비'다.  물론 감독 역시도 이렇게 비정한 이야기를 연달아 하니 인간적으로 힘들단다. "악인전' '법쩐' '대외비'까지 연거푸 센 이야기를 내놓으니 제가 세상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느낌도 든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감독의 굳건한 소신이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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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 이해영 감독이 느낀 뜨거운 찬란함 [인터뷰]

    별안간 1933년 경성 거리, 그 비극과 낭만이 공존하는 시대의 일렁이는 온기가 휘감아 한껏 도취되게 한다. 치밀하고 섬세한 설계 아래 의심과 혼돈을 넘어, 마음이 달떠 애수와 환희에 젖어들기까지, 완벽한 133분의 황홀경이다.  이해영 감독의 영화 '유령'은 일제강점기 시대, 항일 조직 흑색단 스파이 '유령'에 관한 이야기다.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의심받는 용의자들은 벼랑 끝 고립된 호텔에 갇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며 혼란을 야기한다.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캐릭터들이 얽혀 진짜 속내를 드러내기까지 미스터리한 긴장감이 끊임없이 고조되지만, 이해영 감독은 애초부터 '유령'의 시점으로 과감하게 영화를 시작했다. 자신감 넘치는 도발이다. 위기에 빠진 '유령'이 어떻게 이 함정을 벗어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암흑의 시대를 뚫고 나아가는 '유령'이 선사하는 전복의 쾌감은 물론, 강렬하게 뇌리에 박히는 색감과 우아한 미장센까지 어우러져 그저 넋을 놓고 빠져들게 한다. 그만의 유별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해영 감독이다.  그는 "영화에 담기는 것들이 시각적으로 충만한 경험이 되길 바라는 기본적인 천성이 있고 이전 작품엔 강박적으로 아름다움에 집착했다면 '유령'은 조금 달랐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말하길 '유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관련 자료를 보면 그들의 희생과 투쟁이 너무도 찬란해서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들의 절실함, 투철함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란 메시지 이전에 이렇게 충만하고 찬란한 감상을 줬다. 저가 느낀 뉘앙스를 잘 담아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색감, 비주얼, 미장센 등이 모든 수단으로 동원되어야 한단 생각에 전작들보다 유달리 더 공을 들였다고.  빗 속의 우아하고 쓸쓸한 경성 거리,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같은 빗방울, 하얗게 부서지는 담배 연기까지. 감독이 진심으로 빚어내고 정성스레 조각한 '유령'의 시퀀스는 그 어떤 사소한 신이라도 매 순간 눈 뗄 수 없이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감독이 과감하게 추리를 배제한 채 '유령'이 누구인지를 명시한 이유 역시 분명했다. "주인공이 어떻게 이 장소와 상황을 깨부수고 시원하게 폭주하는데까지 다다르게 될까를 선명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중반 이후부터는 복잡한 플롯이나 캐릭터들의 얽힘을 상대적으로 최소화하고 주인공이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인생을 다 바칠 정도로 살았던 건 일제강점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역사 속에서 작은 힌트와 뿌리를 찾으려 했고 실제 흑색 공포단이란 독립운동단체를 모티브로 했다. 이들의 역사적 기록은 상해 육삼정 의거까지다. 누군가가 바톤을 이어받아 끝까지 투쟁하고 있다면 시사하는 바가 더 클 거라 여겼다"고 했다.  결국 '유령'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극과 야만의 시대에 맞선 뜨겁고 찬란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단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들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표한다. 촘촘한 밀도의 디테일, 완벽한 미학적 추구가 그렇다.  '유령'이 감금된 해안 벼랑 끝 호화로운 호텔이라는 이질적 공간도 매우 의미깊다. 보는 순간 압도될 만큼 고풍스러운 호텔은 높은 층고와 구조물, 가구 등 사소한 소품 디테일만 봐도 그 시절 사치를 즐긴 최고위층들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윽고 이 사치스러운 공간의 또 다른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 음습하고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겨난다. 이에 대해 감독은 "처음엔 안락한 공간 안에서 캐릭터들이 부딪히고 교란하는 느낌이 반짝거리고 색감이 많은 공간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장르 변주가 일어나면서는 확 달라져야 했다. 모든 인물과 공간의 민낯이 드러나며 어둡고 색도 없고 더럽고 질척대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면 재밌겠단 생각에 그런 두 가지가 동시에 모여 있는 공간으로 이중적 설계를 했다"는 설명이다.  실로 치밀한 디테일이다. 다만 준지 역의 설경구는 제복 모자가 1mm 라도 어긋나면 이를 바로잡는 이해영 감독의 디테일에 혀를 내둘렀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감독의 항변(?)은 꽤 재밌다. "준지가 경무국에서 좌천됐다가 다시 복귀하는, 이 사람에겐 가장 큰 숙명같은 상징적인 상황이다. 각 잡고 가져온 제복과 모자를 다시 쓰는 것인데 한 번에 써야지 여러 번 고쳐 쓰면 없어 보이지 않나. 선배님이 쓰실 때 약간 마크가 돌아가 있었다. 멋있는 각도를 찾아야 하는데 웃기거나 귀여우면 안 되니까 일미리만 내릴게요, 올릴게요 한 거다. 저의 결벽 때문이 아니라 설경구 선배가 갖고 있는 멋짐을 일미리도 손상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담기 위한 것"이라고. 저가 그리 유난을 떤 덕분에 짜증은 났을지 몰라도 멋지게 담긴 것 아니냐는 능청이다.  비극과 애수, 허망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한 사람들의 가치를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그려내고 싶던 감독의 열망이다. 주인공 차경(이하늬)이 조선 최고의 재력가 집안 딸임에도 독립운동을 하는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란 낭만적인 설정도 감독의 바람이다. "안온한 채로 살아도 될 만한 환경의 사람이 이런 희생을 각오할땐 아마 굉장히 사적으로 밀접하게 그녀를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든 동기가 있었을 거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결핍과 갈망이 어떻게 발현된다면 이는 짐작 가능한 정도의 규모가 아닌, 더 크고 거대한 느낌의 감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이라는 이름 또한 어떤 찬란한 감정과 뉘앙스 안에 담겨서, 이 전체가 뭔가 가슴을 뜨겁게 만들면 좋겠단 맥락으로 묘사하고 집착했다." 감독은 실제 그 시절을 살았다면 "용감하게 살았을진 모르겠다. 최소한 비겁하게 살지 않으려, 용감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해 본다.  이해영 감독은 그만의 확실한 고유색이 있다. 또한 지향하는 바도 뚜렷하다. "매번 다른 이야기를 한 것처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본능적으로 하나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제게 중요한 건 매번 영화를 만들때 인물을 어떻게 담느냐다. 시나리오 쓸 때 캐릭터와 배우가 소화할 때의 캐릭터를 잘 응용해서 가장 매력적이고 정점의 연기를 소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제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해영 감독이 영화를 찍는 보람이다. 그렇기에 "1mm의 차이를 계속 결벽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며 웃긴다. 어쨌든지 이 같은 진심과 고집으로 독보적인 연출과 감각적 미장센의 정점에 도달한 이해영 감독이다.        사진=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