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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흑백에서 빛을 찾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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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1-03-3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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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빚은 절경은 고요하고 선명하기도 하고, 그러다 퍼뜩 요동치는 생명감이 물결을 이룬다. 따스하고 소소하다가도 강렬하고 원대한 이상과 가슴 저미는 애수가 공존한다. 이준익 감독의 흑백 영화 '자산어보'다. 

'자산어보'는 조선의 학자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수산동식물을 조사해 백과사전 방식으로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두에 말하기를 어보를 만들기 위해 섬사람 창대의 도움을 받아 함께 연구하며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짧은 구절로 서로의 벗과 스승이 된 약전과 창대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영화는 긴박감이 감도는 신유박해 사건으로 포문을 연다. 뛰어난 지식으로 정조의 보호를 받던 정약전 형제들은 정조가 죽고 꼭두각시 순조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며 탄압을 받는다. 당시 조선은 절대적인 유교국가였고,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왕권 계층에 대한 위협이라 여겼다. 이로 인해 첫째 아우는 죽임을 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유배길에 오른다. 

이 형제들의 가엾은 이별과 시련은 한시 구절구절과 맞물려 비통함을 더한다. 정적이면서도 깊은 여운을 전하는 장면이다. 본격적으로 흑산도에 도착한 약전과 마을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과정은 소소한 일상성으로 정겨움과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는데, 여기에서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는 형제의 애틋함이 한시와 더불어 아름다운 절경과 어우러지며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어 약전을 서학죄인이라며 멀리하고 경계하던 꼿꼿한 어부 청년 창대가 그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펼쳐진다. 영화는 약전과 창대가 서로의 벗이자 스승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사실 창대는 약전이란 인물의 일상과 신념을 두각하는 기능적인 인물이며 약전과 약용 형제의 대비와 공존이 영화의 핵심이다. 

약전과 약용이 교류하는 신은 극 전반에 걸쳐 분포됐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당시 부정부패가 극심한 관리들과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의 폐단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고통을 담아낸다. 정약용은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어진 임금과 관리가 백성을 아끼는 군자스러운 목민관을 바랐고, 정약전은 백성들 모두가 지식을 갖고 이 지식이 곧 힘이자 권력이 되는 평등 사회의 본질을 바랐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상을 꿈꾸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견해를 나누는 형제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면서도 '다름'의 가치를 포용하는 것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약전이란 인물의 강렬한 이상과 희망, 인간 내면의 외로움과 더불어 그 고결한 존재 가치를 세밀하고 유려하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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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정약전은 학식과 명망이 높은 학자이면서 '자산어보'에 섬사람 창대와 함께 연구한 가치를 기록했다. 이는 체면을 중시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꿨던 약전의 면모를 나타내는 일례다. 영화에서 약전이 해양 생물을 바라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과 더불어, 창대를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며 함께 연구하자고 꼬드기는 모습은 친근하고 정겨워 미소를 짓게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누구나 지식을 갖고 이 지식이 곧 힘이 되는 이상 세계를 꿈꾼 약전의 속내가 엿보이는 것이다. 민초들에 가장 실용적인 책을 만들기 위해 갑오징어의 먹물이 고운 한복에 죄다 튈지라도 배움에 기뻐하고 행복하게 웃는 약전의 모습은 그렇기에 더욱 소소하고 평범하지만 뜻깊다. 

때론 배척당한 지식인으로서 약전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설핏 비치기도 하는데 이 애수는 흑백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히 많은 별빛의 낭만으로 희석되기도 한다. 또한 약전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간 창대가 이상의 좌절로 절망하고 꺾일 때, 정약용이 직접 목도하고 쓴 '애절양'이 휘감으며 비극의 클라이맥스로 정점을 찍는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한시들은 이처럼 영화의 풍미를 더하고, 깊은 잔상과 여운을 남긴다. 

배척당한 지식인 약전에게 낯설고 머나먼 섬 흑산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그는 삶의 소중한 가치와 이상을 향한 강한 열망과 믿음을 지켰다. 그렇게 탄생한 '자산어보'의 가치는 더없이 고결하고 아름다운 빛이 있는 자산이 된다. 

이준익 감독은 사람과 관계를 향한 깊이 있는 통찰로 개인과 시대의 비극을 다루는 동시에 따뜻한 위로와 소망의 빛을 비춘다. 역사 속에 잊힌 인물의 고결한 가치를 되짚는 이준익 감독의 시선은 한결같이 깊은 존경과 낭만으로 가득하다. 

약전이 된 설경구는 사람 냄새나는 일상의 모습부터 때론 강인하고 확고한 학자이자 쓸쓸한 고독감을 엿보게 하는 표정까지 흑백으로 담겨 더욱 선명하게 각인된다. 창대 역의 변요한은 거친 바다 내음이 풍기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두 사람의 호흡은 물론, 극 중 모든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며 제 색을 채운다. 흑백으로 빚은 아름다운 수작이다. 3월 31일 개봉.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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