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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참으로 기기묘묘한 이야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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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예지 기자 댓글 0건 작성일 20-08-2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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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으로 시작된 이야기, 경계를 넘나드는 몽롱함. 들여다볼 때마다 계속해서 헤어날 수 없는 어떤 묘한 기시감. 낯섦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공간의 냄새와 질감, 그 정서와 더불어 그 속에서 유영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호기심과 상념을 빨아들인다. 장률 감독의 '후쿠오카'다.

 

서울 신촌의 허름한 헌책방. 낡은 종이 냄새가 진하게 배어 나올 듯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 틈 사이로 졸고 있는 남자 제문이 보인다. 교복 차림이지만 성인이 분명한 책방의 유일한 단골손님이자 제문이 '또라이'라고 부르는 소담은 뜬금없이 후쿠오카 여행을 제안한다. 후쿠오카에는 제문이 28년 전 절교한 대학 선배 해효가 있다. 금세 장면은 바뀌어 후쿠오카의 전경이 펼쳐진다. 그렇게 절교한 두 남자와 귀신같은 한 여자의 낮밤 알 수 없는 기묘한 '후쿠오카' 여행이 시작된다. 

 

장률 감독 영화 특유의 이른바 환상성의 미학은 '후쿠오카'에서 정점을 찍는다. 증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기억과 시간이 혼재되고, 공간의 전환은 비현실성에서 비롯돼 뒤엉킨 채 재구성된다. 그럼에도 공간과 인물의 질감과 정서가 형성된다. 그러니 장률 감독의 영화만큼은 현실성을 배제하고, 그저 나른하고 파편적인 흐름에 시선을 맡기는 게 좋다.

 

제문과 해효는 대학 연극 동아리의 절친한 선후배였으나 동시에 사랑한 '순이'가 갑자기 흔적을 감추며 앙숙이 됐다. 28년째 서로를 미워하고, 순이를 그리워하며 순이와의 낡은 추억의 끈을 부여 쥐고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살았다. 28년 만에 해효가 운영하는 일본의 술집 들국화에서 다시 만나지만 둘은 여전히 서로가 밉다. 각자 순이는 저를 더 사랑했다고 미련한 옛사랑의 연정을 떠올리며 유치한 싸움을 벌인다.

 

그런 두 사람을 두고 말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가 다시 불쑥 나타나곤 하는 '귀신같은' 소담은 전혀 닮은 구석 없는 두 사람이 똑같단다. 긴장들 하며 살지 말란다. 20대 소담이 50대 아저씨들을 그리 나무란데도 할 말은 없다. 실로 소담은 자유롭다. 언어를 모르면서도 현지인, 심지어 중국인과도 자연스럽게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시종일관 과거에 얽매여 티격태격하는 두 남자에 갑자기 연극을 제안하더니 순이로 변모해 둘을 모두 사랑했었노라고, 앞으로도 둘을 모두 사랑하면 안 되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묻는다.

 

장률 감독이 그려낸 세 사람은 엉뚱하면서 어딘지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 제문을 꼴 보기 싫다면서도 후쿠오카 곳곳을 소개해주는 해효나, 만취해 어린아이처럼 울며 해효에게 투정하는 제문이나 그런 두 사람을 이어주는 소담까지 어쩐지 다정한 온기를 갖고 있다. 서로를 미워했던 두 남자가 조금씩 동질감을 느끼며 마음의 벽을 허물고 비로소 들리지 않던 다른 이의 언어들을 알아듣기 시작할 땐 대견하기까지 하다. 이는 삶의 환경과 방식이 다른 모든 이들이 서로를 가로막는 감정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 즉 '후쿠오카'가 품은 메시지가 또렷이 직시되는 순간이다. 인간적, 사회적, 국가적 소통의 단절과 경계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내면적인 치유를 선사하고픈 감독의 바람이 투영된 두 남자는 서툴지만 조금씩 소통하는 법을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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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후쿠오카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항구 도시이지만 소담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다. 장률 감독은 틈의 미학으로 후쿠오카 틈새, 동네의 정서를 포착한다. 특히 이전 작품들을 통해서도 줄곧 시인 윤동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표현해온 감독은 그가 싸늘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름다운 모순의 도시, 그 공간의 냄새까지도 잊지 않는다. 감독의 존경과 애도가 담긴 윤동주 시인의 흔적은 '자화장'과 '사랑의 전당'으로 극에 등장한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어우러지는 이 시들은 남다른 음율과 생명력을 갖고 극을 휘감는다.

 

특히 '사랑의 전당'에 등장하는 '순이'는 두 남자가 영원히 잊지 못하는 여인의 이름과도 같다. 이처럼 '후쿠오카'에는 사라진, 혹은 잊혀진 정서를 간직한 사람들과 공간들을 포착하는 장률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하다. 몽환적이고 파편적인, 경계를 유영하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 너무 몽롱해서 수많은 의문과 상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기묘한 이야기 '후쿠오카'다. 8월 27일 개봉.

 

한예지 기자 news@moviefor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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